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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지역소식

북한 가족 생각에 가슴 미어져

“북한 가족 생각에 가슴 미어져”
입력시간 : 2013. 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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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 있는 자식들 그리움에 매일 일기 써
“하루빨리 통일 돼 아들·딸 만났으면…”

■ 광주 거주 새터민 김순애씨

“방송을 통해 북한을 접할 때나 명절만 되면 자식과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그 마음을 일기장을 통해 달래곤 하죠. 빨리 통일이 돼 가족들을 다시 만나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15일 오전 10시 30분께 광주 북구 매곡동 대한적십자사 광주·전남지사 다목적강당에서 새터민, 봉사자와 함께 어울려 송편을 빚던 김순애씨(68·여)를 만날 수 있었다.
밝고 유쾌한 성격인 김씨는 농담을 하며 새터민과 봉사자들이 어색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북돋기도 했다. 늘 밝고 명랑하기만 한 김씨는 북한을 탈출한 새터민이다.
북한에서 체신소(우체국)에서 근무했던 김씨는 화폐개혁을 앞두고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지난 2000년 함경북도 무산에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 화룡시 난핑으로 탈북했다.
김씨는 “북에서는 화폐개혁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화폐개혁 소식을 미리 접한 노동당 간부 사모들의 요구로 정부에서 금지한 현금 입금 조치를 하게 됐다”면서 “이를 기화로 국가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버렸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평양에서 아버지는 인민군 장교로, 형제들은 물론 김씨까지 군복무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주 유복하게 살았지만 역적으로 몰리자 겉잡을 수 없게 됐다.
김씨는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2남 2녀의 자식들을 남겨 둔 채 함경북도 무산으로 장사하러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왔다. 당시 무산에서는 중국인들의 교류가 수월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결정한 것이었다고 한다.
김씨는 이후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서 5년간 가정부 생활을 하며 돈을 모은 뒤 한국으로 향했다.
김씨는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도 추석으로 기억한다”며 “인천공항으로 들어선 순간 화려한 불빛 야경이 꼭 러시아 같았다”고 말했다.
지난 2005년 한국에 입국한 그는 2006년부터 광주에 터를 잡았다. 서글서글한 성격 탓에 사람들과 어려움 없이 지내 온 김씨지만 북한을 떠날 당시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김씨는 “두만강 앞에서 세 시간 동안 눈물을 흘리며 자식들을 떠올렸다”면서 “이 강을 건너면 다시 돌아 올 수 없다는 생각에 망설여졌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렇게 떠나 온 고향 탓인지 김씨는 명절 때가 다가오면 북한에 있을 가족 생각에 외롭기만 하다.
한편, 김씨는 명절만 되면 적십자사 광주·전남지사와 광주 북구하나센터에서 주관하는 북한이주민 추석맞이 합동차례에 참여해 먼저 떠난 남편을 기린다. 김씨는 이 날도 100여명의 새터민들과 함께 합동차례를 지냈다.
김씨 남편은 평양에서 구역당 경제부에서 일했는데 1997년 평양 대건설 당시 사고로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그는 “남편과 군복무 중 만났는데 고아였던 남편의 차분한 성격과 남을 이끄는 리더십에 반해 결혼을 했다”면서 “탈북 이후 죽은 남편은 물론 자식이 그렇게 좋아하던 국수만 보면 눈물이 나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남한에서의 그간 생활을 회고했다.
김씨는 “명절과 아이들의 생일, 가족이 그리울 때면 그들과 대화하듯 하고싶은 말들을 일기를 통해 써내려 가는 게 유일한 낙이다”며 “자식들이 중국에 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신문광고도 내봤지만 소용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이뤄져 가족들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