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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九州

가라쓰 기행7-침략의 전초기지 나고야(名護屋)성을 가다(1)

가라쓰 인근의 요부코(呼子)라는 작은 어촌 마을. 특히 오징어로 유명한 곳이다.

특이하게 오징어를 말리는 모습. 파리 끓지 말라고 저렇게 빙빙 돌린다고 하니 꽤 신선한 아이디어.

 

 

 

일본 3대 아침시장이라는 요부코 아침시장. 아침시장이란게 광주로 치면 남광주 시장같은 새벽시장이란

의미일까? 오전시간엔 한산하다.

 

한자만 빼면 한국 어디 시골 5일장이라고 해도 믿을 소박한 분위기다.  

 

 

 

 

 

 

 

 

우리네 재래시장과 너무도 흡사한 분위기. 오징어로 유명한 고장답게 건어물이 많다.

맛뵈기며 덤까지 일본사람 깍쟁이라지만 시장에서 만큼은 별반 차이 없는 모습이다.

장사 안 돼서 죽겠다는 푸념까지 한국과 똑같다.

 

 

 

평범하기 짝이없는 시골마을같지만 요부코는 과거 대전란의 중심지였던 곳이기도 하다.

유명한 히젠 나고야(名護屋) 성이 바로 이 지역에 있었던 것.

히데요시는 침략의 전진기지로 한반도와 최단거리인 가라쓰 지역을 택했고

그래서 축조한 것이 나고야 성이다.

성은 도쿠가와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 성터에 지난 1993년 나고야성 박물관을 세웠다고 한다.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의 교류사... 한일교류사 정도로 순화시켜서 표현할 수 있겠다.

 

 

여수시와 자매도시인 가라쓰시. 엑스포 기간에 페리도 임시 운항을 했다.

이 박물관에선 한국어 강좌 등 한국과 관련된 일련의 행사들을 많이 개최하고 있다.

 

가라쓰 쪽에선 마쯔리를 쿤치라는 사투리로 표현한다. 가라쓰 쿤치 홍보물

 

 

 

한일교류사가 전시 테마이긴 하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임진왜란과 관련된 전시물이 많다.

이것은 나고야성 모형. 1591년 10월 축성의 달인이라 불리는 가토 기요마사의 지휘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대본영 역할을 했으며 사방 3km에 히데요시가 머무는 본성, 일본 전국의 다이묘들이

머물 수 있는 160여개의 크고 작은 성군(城群)이다.

본성은 무려 4만 3천평 규모로 5층 높이의 천수각이 지어졌고 무슨 날림공사도 아니고

약 5개월만에 완공되었다.

연인원 30만 7천여명이 동원됐고 이중 조선으로 출진한 총병력은 20만 5천여명...

날림공사였는지 어땠는지 몰라도 규모만큼은 히데요시의 거성인 오사카성 다음가는 규모였단다.

 

 

 

 

 

 

 

 

혼마루 중심으로 일본 각지에서 모여든 다이묘들이 포진한 모습.

 

도쿠가와군은 규모가 커서 여러 곳에 분산배치된 듯 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해

혼다 다다카쓰, 오쿠보 다다치카 등이 포진.

 

훗날 오사카 성 전투에서 이에야스와 맞붙게 되는 오노 하루나가가 이에야스와 이웃해 포진한 것도

흥미롭다.

 

임진왜란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영은 거물인 마에다 도시이에와 맞닿아 있다.

 

 

 

 

 

 

임진왜란 이외에도 각종 한일관계사 관련 자료들을 전시중이다.

 

 

 

"사루~!" 도오툐미 히데요시의 목상이다. 물론 레플리카다.

뭐랄까 성쌓기 덕후이자 성 공격의 달인이었다는 요놈.

오다와라의 호조씨를 정벌할 때는 일야성(一夜城)을 쌓기도 했던

히데요시는 왜란 당시 명나라 사신의 기를 죽인답시고 멀쩡한 오사카성을 놔두고 후시미성을

따로 쌓기도 했다. 히젠 나고야 성이나 후시미 성 모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허물어진다.

 

 

임진왜란 당시의 진격로 이순신은 물론 김천일,고경명,조헌 같은 의병장들의 이름도 보인다.

 

울산성 전투도. 물론 레플리카다. 일본측에서 봤을 때 임진왜란 최고의 스타(?)는 가토 기요마사.

시즈가다케 7본창이라는 타이틀 외엔 나이와 군공에 비해 턱없이 많은 영지를 받았던 가토였지만   

경과야 어찌됐던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은데다 함경도 국경을 넘어 만주에 살짝 발을 담구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이 울산성 전투에서 악전 고투끝에 명군을 막아내며 '일본의 용맹을 당(唐)까지 알린

장수'라는 칭송을 듣는다. 세키가하라 전야, 도쿠가와 이에야스조차 가토를 포섭하면서

'일본최고의 용장'이란 입에 발린 칭찬으로 가토를 띄워준다.

 

 

 

 

 

 

 

 

강항과 일본 주자학의 비조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본래 후지와라 세이카는 살벌한 당시의 일본사회에선 전혀 적응을 못하던 전형적인 학자풍 인물이다.

학문을 천대하고 칼잡이만 출세하는 일본을 증오한 나머지 사쓰마에서 배를 타고

일본 탈출을 꾀하기도 했다.

 

강항으로부터 중국이나 조선에 유학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제도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왜 조선이나 대명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꼬?"라고 한탄하기도 했고  "지금 일본은 외국 정벌 때문에 서민들이 피폐해 있다. 만약 대명,조선 연합군이 일본의 백성을 평안케 한다는 명목으로 하카타에 상륙하여 진군하는 곳곳마다 이를 철저히 실행한다면 백성들이 이를 환영하여 순식간에 오슈(奧州)까지 석권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꽤 반역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어지간히 무골이 횡횡했던 당시 일본 사회에 적응이 안 된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후지와라의 제안은 이미 명이나 조선의 국력으론 불가능한 이상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