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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대만 국기가 내려졌다

중국 압력 ‘타이완’ 국호도 금지
‘데탕트’ 시대의 ‘희생양’으로 전락
평창선 대만 올림픽위원회기 들어

 

 9일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대만 올림픽 선수단이 국기(청천백일만지홍기) 대신 대만올림픽위원회기를 들고 입장하고 있다. [로이터] 지난 9일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을 두고 중국에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대만이 입장할 때 일부 방송사가 ‘타이완’이라는 자막을 달자, 중국 누리꾼들이 ‘차이니즈 타이베이(Chinese Taipei)’라고 적지 않았다며 반발한 것입니다. 일부는 수도를 타이베이라고 적시한 것도 문제 삼았습니다.

‘하나의 중국(One China)’ 정책을 고수하는 중국의 압력 때문에 대만이 국제경기에서 자국의 국기 대신 올림픽위원회기를 들고 입장하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풍경입니다. 지난해 초에는 걸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가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대만과 한국의 국기를 함께 들고 있다가 논란이 일파만파 퍼지기도 했고요.

 태극기와 대만 국기를 들고 방송에 출연했다가 사과 동영상을 올린 걸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 [중앙포토]

스포츠 행사는 표면적으로 비정치성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국가 경쟁 구도로 인한 내셔널리즘의 작용 때문에 정치·사회적 속성과 떼기 어렵습니다. 우리 국가대표 선수를 ‘태극전사(太極戰士)’라고 부르거나 일본이 월드클래식베이스볼에 출전한 대표팀을 ‘사무라이 저팬(Samurai Japan)’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특히 국제 스포츠 행사의 대표 격인 근대 올림픽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올림픽 스타디움이 얼마나 정치 외교의 무대로 활용됐는지 확인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제1회 아테네 올림픽(1896년)의 개최엔 그리스의 정치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오스만튀르크(지금의 터키)로부터 독립한 지 얼마 안 되는 데다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마저 덴마크 출신이라 국가적 통일성을 위해 강력한 촉매제가 필요했던 상황에서 올림픽은 호재가 됐습니다.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올림픽(제3회 세인트루이스) 개최를 ‘대선용’으로 활용했죠. 대회장 곳곳에 하켄크로이츠(Hakenkreuz)가 나부끼며 독일 나치의 선전장이 됐던 제11회 베를린 대회는 최악의 올림픽으로 남아있습니다.

심지어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도 국제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고대 아테네가 페르시아 제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마라톤 전투‘에서 유래됐기에 페르시아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란에서는 마라톤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란에게 마라톤은 수치스러운 역사의 흔적일 뿐이거든요. 이런 이유로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게임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마라톤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올림픽을 통해 국제정치의 갈등을 무마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강대국들의 갈등이 고조되던 1912년엔 전쟁의 기운을 억제하기 위해 1916년 제6회 대회 개최지를 독일 베를린으로 선정했습니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영국과 프랑스는 교전국이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1920년 열린 제7회 앤트워프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막는 방법으로 ’응징‘했죠. 이런 분위기는 훗날 제2차 세계대전의 촉매제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성공 사례도 있습니다. ’핑퐁 외교‘로 알려진 미국과 중국의 수교입니다.

1971년 4월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자국 버스를 놓친 미국의 글렌 코완 선수가 우연히 중국팀 버스를 얻어 타면서 실타래가 풀렸던 ’핑퐁 외교‘는 스포츠 외교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남아있습니다.

6·25 전쟁이래 적대적이었던 양국은 이듬해인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데탕트’ 시대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평화와 화해의 시대를 여는 전환점이 된 ‘핑퐁 외교’가 악몽으로 돌아온 국가도 있습니다. 바로 대만입니다.

대만 선수단의 올림픽철수 임박 소식을 알린 1976년 7월15일자 1면 기사(위)와 캐나다의 최종 협상안을 대만이 거부했다는 내용을 전한 7월 17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아래)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개막식을 사흘 앞둔 상황에서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자유중국, 즉 대만이 국호·국기·국가 사용을 금지한 주최국 캐나다의 조치에 반발해 보이콧을 선언한 것입니다. 캐나다는 불과 올림픽 2달을 앞둔 1976년 5월, 대만 측에 그간 써왔던 중화민국(The republic of China) 국호를 쓸 수 없다고 통보했습니다. 대만은 이를 무시하고 선수단을 파견한 뒤 결정을 뒤집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사실 대만은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우방국인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올림픽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았죠.

하지만 1972년 역사적인 데탕트 무드를 만들어낸 지 겨우 4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미국으로서는 대만의 손만 들어주기도 곤란한 상황이었고, 캐나다를 비롯해 서방 국가들이 이를 모를 리 없었습니다. (미국은 몬트리올 올림픽이 끝난 뒤인 1979년 중국과 공식 수교를 맺었습니다.)

분위기는 점차 대만에 불리해졌습니다. 캐나다 측은 국기는 사용하되 국호는 ‘타이완’으로 한다는 최종 협상안을 내놨습니다. 대만은 수용을 거부했지만 미국은 올림픽 참가로 선회했습니다.

 

제2차 국공내전 당시 공산당(중국)과 국민당(중화민국) 영역
결국 대만 선수단은 개막을 이틀 남겨두고 올림픽에서 철수했고, 몬트리올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대만의 국기는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이후 대만이 하계 올림픽에 복귀한 것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입니다. 이때는 ‘타이완’이라는 명칭과 국기마저 금지됐습니다. ‘타이완’ 대신 ‘차이니즈 타이완(Chinese Taiwan)’이라는 명칭을, 국기 대신 대만올림픽위원회기를 사용하게 됐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자신과 함께 싸워줄 우군이 없는 대만으로서는 8년 전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문재인 정부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남북 화해의 무대로 연출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이어 예술 공연단을 초청했고,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과 만찬을 갖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23일 천안함 폭침의 주모자로 알려진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까지 폐막식에 참가하면서 논란도 적지 않습니다.

일부 정치인들은 ‘핑퐁 외교’를 언급하며 극적인 남북 화해의 달콤한 결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만 사례에서 나타나듯 ‘핑퐁 외교’가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세계 각국의 움직임과 주변국과의 관계입니다.

이제 올림픽을 마치면 문재인 정부에게 외교 청구서가 날아올 것입니다. 청구서의 적힌 금액을 보며 과연 우리는 웃게 될까요, 탄식하게 될까요.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
대만(중화민국) 국기.
중화민국(대만)의 국기(國旗). 줄여서 청천백일기로도 부른다. 중화민국 헌법 제1장 6조에 국기로써 명시되어 있다. 파란색, 빨간색, 흰색은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쑨원의 삼민주의 사상인 민족, 민생, 민권을 상징한다. 1928년 장제스가 주도한 중화민국 난징정부 시절 국기로 제정됐다. 빨간색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대만에서 오랫동안 집권한 국민당의 당기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사용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