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칭 재개발 여파로 2013년 철거돼 지금은 공사장으로 변했다. /독립기념관·성유진 기자
중국 내 임정 유적지 가보니… 광복군 건물 등 철거되거나 팔려
내년이 임정 수립 100주년인데 충칭 청사 4곳중 3곳 없어지고 광복군 사령부 자리엔 고층빌딩
사유지로 바뀌어 출입 막힌 곳도 "남은 유적만이라도 꼭 지켜야"
올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주년, 내년은 그 뿌리가 됐던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임정은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에서 세워져 충칭에서 광복을 맞았다. 국내외에선 100주년을 앞두고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 등 각종 기념행사가 준비 중이다. 그런데 정작 중국 내 임정 유적지들은 사라지고 있다. 일부는 중국의 개발 논리에 밀려 철거됐다. 사유지가 돼 관목(灌木)으로 뒤덮인 곳도 있다.
지난 1월 25일 중국 충칭(重慶) 허핑루(和平路) 우스예샹(吳師爺巷) 임시정부 청사 터. 고층 빌딩이 늘어선 도로 오른쪽으로 거대한 공사장이 펼쳐졌다.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는 "이곳은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 하편을 집필한 역사적인 장소인데, 건물이 철거된 상태"라고 했다. 우스예샹 청사는 임정이 상하이에서 1940년 9월 충칭으로 온 뒤 사용한 세 번째 청사였다. 2층 목조 가옥으로 방이 70여칸이나 됐다. 임정이 1945년 1월 롄화츠(蓮花池) 청사로 옮겨갈 때까지 충칭 시기에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곳이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상권을 쓰던 때에 비하면 하권을 쓰는 지금의 임시정부는 약간의 진보 상태로 볼 수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이 독립의 꿈을 키운 이곳은 2012년 허핑루 일대 재개발이 확정되며 철거됐다. 충칭시 정부는 재개발 후 청사를 복원한다는 계획이지만 원형은 사라진 것이다.
충칭은 2000년대 이후 가장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도시이다. 곳곳에서 재개발 붐이 일었다. 충칭의 임정 청사는 총 4곳이었다. 2곳은 1940년대 폭격과 화재로 무너졌고, 우스예샹은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롄화츠에 있는 한 곳뿐이다.
충칭 롄화츠 임정 청사 관계자는 "대규모 개발이 이뤄지며 충칭 내 항일 유적지가 반 이상 사라졌다"고 했다.
한·중 수교 직후인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충칭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오사야항 청사, 토교 한인촌 건물 등이 일부나마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 현재는 지난해 12월 문재인 대통령이 찾았던 롄화츠 임정 청사 정도만이 남아 있다.
우스예샹 청사에서 500m 떨어진 광복군 총사령부 청사도 공사장으로 변해 있었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충칭에서 창설됐다. 이후 서안으로 근거지를 옮겼다가 1942년 다시 충칭으로 이전했다. 일본군에서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청년들이 속속 탈출해 이곳으로 찾아왔다. 이 건물은 2010년대 초반까지도 낡은 모습이었지만 일부 남아 있었다. 그러나 2016년 철거돼 지금은 주상복합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 철거 전 충칭시 정부가 원형 보존 의사를 우리 정부에 전했으나, 조건이 맞지 않아 무산됐다. 지난해 말 문재인 대통령이 총사령부 터 복원 사업에 합의했지만 복원 장소는 다른 곳이 될 것으로 보인다. 臨政 가족들 살던 곳, 집들은 다 어디로 가고… ‐ 중국 충칭시 남서쪽‘한인 거주 옛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임시정부 가족들이 쓰던 민가가 남아 있었다(왼쪽 사진). 지금은 풀숲으로 변했고, 한쪽엔 공장 창고가 들어서 있다. /독립기념관·성유진 기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백범일지' 독후감 대회에서 수상한 대학생 20여명, 한시준 교수 등과 함께 지난 1월 22일부터 5박6일 일정으로 중국 내 임시정부 유적지를 찾았다. 이 중 절반 정도는 터나 공사장을 찾는 일정이었다. 임정이 쓰던 건물 대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거나 사유지가 돼 밖에서 지켜봐야 하는 곳들도 있었다.
◇풀숲 된 한인촌
충칭 도심 서남부에 있는 한 산비탈 길을 오르자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관목과 풀로 뒤덮여 한 발을 내딛기 어려웠다. 풀숲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인 거주 옛터'라는 검은색 표지석이 보였다.
1940년 9월 충칭으로 옮겨온 임시정부 가족들은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 김구 선생은 당시의 상황을 '백범일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중경에서 기장 쪽으로 40리쯤 되는 곳에 토교라는 시골 시장이 있는데, 그곳에 화계(花溪)와 폭포가 있고…(중략), 기와집 세 채를 짓고, 2층 민가 한 채를 사들여 100여명의 대식구를 살게 하였다.' 지금은 기와집도, 민가도 남아 있지 않다. 동감폭포는 도로와 댐이 들어서면서 없어졌고, 산비탈의 토교 한인촌 역시 완전히 사라졌다. 탐방단장인 한시준 교수는 "1990년대 초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기와집 2채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몇 년 뒤 다시 와보니 완전히 헐려 있었다"고 했다.
항저우 한국독립당 사무소 자리에는 기념 표지석만 남아 있었다. 임정 요인들이 살았던 오복리 거주지는 사유지가 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한국인 많이 찾아주길"
중국 산시성의 성도 시안(西安)의 임정 관련 유적지에선 한국인을 보기 어려웠다. 한국 관광객은 대부분 병마용 등을 둘러보고 떠난다. 현지 관광 가이드는 "시안 임시정부 유적지는 상하이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인 관광객들도 먼저 가자고 요청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했다.
임시정부는 1940년 11월 이곳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중국 각지에 흩어진 무장 세력을 흡수했다. 이 건물은 시내 이푸제(二府街) 4호에 자리 잡았다. 무정부주의 청년 조직으로 후에 광복군에 편입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건물도 같은 거리 29호에 있었다. 현재 이 거리는 각종 상점과 관공서가 밀집한 곳으로 변모했다. 총사령부 건물은 1995년 도로 확장을 하며 사라졌고, 전지공작대 건물 자리에는 중급인민법원이 들어섰다.
한시준 교수는 답사를 함께 한 학생들에게 "유적지가 남아 있으면 한국과 중국 모두에서 찾아와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여러분도 적극적으로 역사 유적을 살릴 수 있도록 힘쓰는 사람이 돼 달라"고 했다. 김대용(부산대 항공우주공학과 1년)씨는 "남의 나라 땅에 있는 유적지라 우리나라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 중국 정부와 협의해야 할 것 같다"며 "남아 있는 유적지라도 한국인이 더 많이 찾아와 더 이상 철거되거나 사라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5조 3교대·탄력근로제…‘주 52시간 황금률’ 찾아라 (0) | 2018.03.01 |
---|---|
성폭력 폭로에 “나도 혹시” 전전긍긍… 술자리ㆍ노래방 발길 뚝 (0) | 2018.03.01 |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대만 국기가 내려졌다 (0) | 2018.03.01 |
[평창올림픽] ‘탱크’ 거절할 상황 없었는데 주장이 엇갈린다니… (0) | 2018.03.01 |
곽도원 "이윤택 극단서 쫓겨난 후 연극 못 해"…과거 발언 화제 (0) | 2018.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