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 전(前)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성폭력 파문으로 연극계가 발칵 뒤집혔다. 특히 “관습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이 전 감독의 해명을 두고 연극계 내부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폐쇄적이고 상명하복하는 현장 구조를 혁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극계에서 관습’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게 된 이유는 뭘까. 무대 안팎의 사람들은 크게 5가지 이유를 꼽았다.
① 연출자가 절대권력 쥐는 제왕적 시스템
이윤택에게 당했던 피해자 다수는 “그는 연극의 세계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그가 18년간 성폭력을 지속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이 같은 ‘제왕적 시스템’이 꼽힌다. 절대권력을 가진 연출자가 배우들을 쥐고 흔든다는 것이다.
캐스팅 권한을 완전히 쥐고 흔드는 예술감독의 위치는 ‘황제’에 가깝다. 서울 소재의 한 예술대학 학생 A씨는 “연극계에서 주목받으려면 주요 배역을 따내야 하고, 또 그러려면 연출가·예술감독에게 잘 보여야 한다”면서 “이윤택 같은 거장은 자연스럽게 그 세계에서 왕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가 있는 극단을 나온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연극계가 좁다 보니 입소문이 잘못 나면 다른 극단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피해자들이 ‘이윤택에게 찍히면 연기를 할 수가 없다’는 공포를 느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승비 극단 나비꿈 대표는 “이윤택에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한 대가로 출연하던 작품에서 출연횟수 제한을 당했다”고 말했다.
여성문화예술인연대 박은선씨는 “문화예술계는 경력, 인맥 중심의 남성적인 문화인 데다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인지도를 높여가는 게 일반적”이라며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도 오랜 시간 일궈 온 꿈을 포기하는 게 쉽지 않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문화예술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신고하지 않고 참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②도제식(徒弟式)문화
연극계 성폭력은 스승과 제자, 교수와 학생, 연출가와 지망생 등 사이에서 주로 나타난다. 연기교육이 도제식(徒弟式)으로 전파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연극인 김수경씨는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연극연습을 할 때 발성에 대한 지적을 할 때 특훈이 필요하다면서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몸을 만지거나, 껴안는 일이 있었다”며 “노출 조항에 동의한 적도 없는데 연극 도중 옷을 과감히 벗어 던지지 않는다면서 갑자기 옷을 끌어 내리는 일도 있다”고 적었다. 이윤택에게 성추행당했다는 연극배우 B씨는“갓 20살이 된 단원도 연기 명목 하에 성추행을 당했고, 결국 그 아이는 극단을 도망쳤다”고 밝혔다.
청소년들도 ‘도제식 교육’을 빙자한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 김해 극단 '번작이’에서 활동했던 김모씨는 16살 때 극단 대표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김씨는 “(가해자는)처음으로 나의 대본을 칭찬해 준 스승이었고 연극에 대해 알려준 사람이었다”며 “연기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소중했다”고 했다.
③ 피해자가 고립되는 문화
성폭력 가해자가 예술적으로 존경받는 존재여서 구성원 모두가 쉬쉬하는 경우도 있다. 마치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감히 허물을 지적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나도 안마를 한 적은 있지만 (당시)성추행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성폭력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고 ‘예술적인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강해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힘있는 연출자에게 찍힐까 봐 성폭력 사실을 알고도 다른 구성원들이 방관하는 경우가 많다. 이윤택이 이끄는 연희단거리패 내부에서는 성폭력 피해자가 오히려 고립되고 ‘왕따’를 당했다.
이재령 음악극단 콩나물 대표는 22살 때 연희단거리패에 들어가 이윤택의 안마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다. 이 대표는 “안마를 거부하면 다음날부터 극단 안에서 외톨이가 됐다”고 토로했다. 안마를 거부한 단원은 배역에서 빠질 뿐 아니라 악의적인 루머와 멸시에 시달려 이의제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는 “이윤택은 그 단원에게 어떤 식으로든 트집 잡고 공개 폭언을 해 외톨이로 만들었다”고 했다.
한때 연극무대에 섰던 최모씨는 피해자들에게 폭언했던 경우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과거에 안마를 하고 돌아온 동기언니에게 야망이 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함부로 얘기했었다”며 “‘어차피 죽으면 사라질 몸, 마음껏 써버려라’, ‘쓰면 닳냐?’, ‘무대에 설 수 있다면 벗는 게 어려우냐’라는 식으로 쉽게 말했던 것이 미안하다”고 썼다.
④가해자 대부분이 프리랜서… 제재가 어려워
“가해 예술가들은 프리랜서인 경우가 많아요. 이 사람들이 성폭력을 저질렀을 때 (형사적 처벌 외에) 업계 내에서 제재를 가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가해자 다수가 예술계에서 제재 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성문화예술인연대 박은선씨 얘기다.
문화예술계 성폭력 피해자 지원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고소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 제재할 방법은 당사자에게 활동 자제요청을 하거나 가해자가 일하는 회사나 기관에 공문을 보내 계약을 파기하도록 요청하는 정도에 그친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법적인 절차 대신 인권위나 고용노동부와 해결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때 가해자가 고용관계를 부인하면 확인 과정이 어려울 수 있다”며 “연극인들끼리 업계 특성에 맞게 내규를 만들고 징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⑤ 많지 않은 수입… 역고소 위험도
수입이 많지 않은 연극계 사정상 한번 송사(訟事)에 휘말리면,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진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실제 연극계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이 실제 고소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여성예술인연합에서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성폭력 사건 51건 중 실제로 신고된 건수는 5건뿐이었다.
성폭력 가해자에게 소송을 걸었다 오히려 역으로 고소를 당하는 경우도 흔하다. 지난 2016년말부터 2017년 10월까지 여성문화예술연합이 지원한 피해자 18명 중 가해자를 고소한 사건은 8건이 었지만, 15건은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당했다.
배복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는 “성폭력으로 신고를 하면 피해자가 강력한 처벌 의사를 유지하면서 적극적으로 진술하고, 자료도 제출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가해자가 무고죄로 고발한다고 협박하는 경우가 있다”며 “소송 비용, 역고소, 2차 피해가 두려워서 신고하지 못하는 피해자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20/20180220021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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