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두림바이 구룬)황제의 성지를 받들어 경계를 확정하려 파견된 대신들인 내대신 소에투(색액도)등과, 러시아국(오로스 구룬) 천가한(天可汗)의 칙명으로 경계를 확정하려 파견된 사신들인 골로빈 등은, 강희(康熙) 28년 7월 20일에, 니포초(尼布楚)에서 만났다. 이제부터 화평을 맺어 영원한 평화 속에서 살아가고자, 다음과 같이 합의하여 결정하였다......”
<네르친스크 조약 전문(前文): 만주어판>
1689년 8월 12일, 북경에서 약 1500킬로미터, 모스크바에서는 약 80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작은 요새 도시, 네르친스크에 청나라와 러시아의 대표들이 마주 앉았다. 그리고 보름만인 8월 27일, 위와 같은 전문으로 시작되는 역사적인 조약을 맺었다.
서유럽 국가들의 해상제국 건설에 비길 만한 러시아의 육상제국 건설 과정은 16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시베리아를 다스리는 칸의 백성들을 주로 코사크 병사들이 습격하여 정복하고, 요새 도시를 세우고, 그러기를 반복하며 계속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아가는 과정. 그 과정은 17세기에도 계속되어 1605년에 시베리아 중부에 톰스크가 건설되었고, 1606년에는 몽골에서 북극해로 흐르는 예니세이 강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20여 년, 시베리아 정복이 시작된 뒤로 약 반세기만에, 러시아인들은 만주경계에 이르게 된다.
1643년, 모스크비친이 이끄는 ‘탐험대’가 오호츠크 해를 탐사했으며,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무르강(흑룡강) 유역과 사할린 섬을 조사했다.
하바로프스크의 하바로프 동상
1년 뒤 이자성군을 격파한 청나라가 북경을 차지하고 청의 3대 황제 순치제가 등극하는 가운데, 러시아에서는 탐험대를 순차적으로 파견했는데 포야르코프 탐험대와 하바로프 탐험대가 바로 그들이다. 러시아 극동 진출의 영웅인 하바로프의 이름은 도시이름으로도 남게 된다.
1651년, 하바로프는 본국에서 증원된 병력을 이끌고 흑룡강 유역의 다우르족을 공격했다. 소수의 청나라 군사가 지원했으나 다우르족은 패배했고, 하바로프는 한동안 러시아군의 제1전진기지가 될 알바진 요새를 세웠다. 이듬해에는 네르친스크가 세워졌으며, 시베리아 중부에서 새 땅을 개척하기 위
한 정착민들이 속속 도착했다.
이쯤 되자 청나라도 긴장했다. 그리하여 2천의 병력으로 알바진을 공략하게 했는데, 이에 맞선 러시아군은 2백에 불과했으나 우수한 무기 등에 힘입어 잘 싸웠다. 청나라는 무기의 불리함을 극복하고자 조선에까지 조총수들을 파병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그것이 바로 1차 나선정벌이다. 1654년에 조선군 156명과 청군 3천여 명이 송화강 중류인 혼동강에서 러시아군과 충돌했으며, 그 결과는 잘 알려진대로 조청연합군의 완승이었다.
제2차 나선정벌을 포함해 산발적인 공방전을 펼친 끝에 1660년 이후로는 청나라 쪽이 우세를 잡았다.
하지만 1661년 순치제의 죽음, 오오바이의 반란, 삼번의 존재 등으로 청나라 내부가 어수선했던 까닭에 러시아는 다시금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 결과 1667년 다우르족 족장 간티무르가 300명의 부족원들 및 가족들과 함께 청나라를 버리고 러시아에 투항하고, 정교회로 개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순 러시아가 흑룡강 대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 처럼 보였으나 당시 17세의 소년 황제 애신각라현엽, 즉 강희제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청은 지속적으로 간티무르를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부하다가 1670년 밀라바노프를 단장으로 한 사절단을 보내왔다. 청나라는 이들이 간티무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온 줄 알았으나 이들의 국서엔 전혀 엉뚱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너희들은 중국의 칸에게 이렇게 설명하라. 러시아 황제 폐하 최고 통치 아래 너 중국의 칸 역시 우리 대군주에게 도움을 구하라! 러시아 황제 폐하의 은혜는 영원히 변치 않고, 우리 대군주에게 공납을 바치고, 우리 대군주가 윤허하여 러시아 황제 폐하의 신민은, 너희 나라 신민과 쌍방 국경 안에서 자유롭게 통상하라."
명을 계승해 주변국 조공질서를 확립하고 있던 청의 입장으로써는 어처구니 없는 국서였다. 제대로 번역됬다면 밀라바노프 사절단은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됐을 것이고 조정에선 아라사 토벌을 논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신단 입장에선 천만 다행으로, 당시 북경 조정에 러시아어를 제대로 번역해줄 만한 사람은 없었다. 강희제는 외려 이들을 융숭히 대접하고는 간티무르를 송환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는 만주어에서 몽고어로 통역된 후 다시 러시아어로 전달되었다. 이들 사신단은 무려 6년만에 돌아왔지만 별다른 소득 없이 청황제의 국서를 번역할 사람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삼번의 난이 발발하면서 청 역시 북방의 일에 신경쓸 여유는 없었다.
1681년에 삼번의 난을 제압한 강희제는 곧바로 흑룡강 일대 러시아인들을 공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이제 한창 나이인 28세가 되었다.
한편 러시아에서도 저 유명한 표트르 1세(Pyotr I, 1672~1725)가 즉위했으나, 역시 11세에 불과하여 그의 이복누이 소피아가 섭정이 되었다.
1685년, 만반의 준비를 갖춘 청나라의 공략군은 알바진 요새를 함락시켰다. 강희제는 항복한 러시아인들이 네르친스크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으나, 그들은 얼마 후 지원군과 함께 돌아와 알바진을 탈환했다. 재개된 전투는 10개월을 끌었는데, 요새의 러시아군은 8백 명이 70명이 될 때까지 악착같이 버텼다.
강희제는 일단 군대를 물려 재정비한 다음 다시 알바진을 공격하려 했으나, 1688년에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몽골은 동부의 할하 부(部)와 서부의 준가르 부(部)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할하 부는 청나라에 복속해 있었다. 그런데 준가르의 가르단이 할하를 공격, 할하의 족장들이 청나라로 피신해왔던 것이다.
러시아인이 비록 소수이지만 만만찮은 적수임이 확인된 가운데 그들과 준가르가 힘을 합친다면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준가르와 러시아는 딱히 관계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전쟁보다는 외교를 통해 그것을 막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강희제를 사로잡았다.
사정은 러시아도 비슷했다. 1686년부터 폴란드, 베네치아,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 첫걸음으로 투르크의 속국인 크림 칸국을 병합하려 했으나, 생각대로 전황이 풀리지 않아 당황하던 때였다. ,너무 먼 극동까지 병력을 공급할 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도 타협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렇게 양쪽의 속셈이 일치함으로써 네르친스크 조약의 문이 열렸다.
러시아는 표도르 골로빈을 대표로 하는 천여 명의 대표단을 파견했고, 청나라는 색액도를 필두로 하는 통역을 맡을 예수회 신부들인 제르비용, 페레이라, 그리고 76척의 군함, 5천 마리의 군마 및 낙타, 1만 5천의 병력을 파견했다. 전쟁 때보다도 많은 병력을 교섭회담장에 딸려 보낸 것은 러시아인들을 위압하기 위해서였다.
흑룡강 유역에 ‘개척’해놓은 땅을 양보하지 않으려는 러시아 측과 그렇다면 회담을 할 까닭이 없다는 청나라 측의 의견이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렸다. 하지만 결국 회담장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던 청나라 군대의 무력시위가 먹혔던지, 러시아 측이 한 걸음 물러서는 식으로 정리가 되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정해진 경계.
• 고르비차강의 발원지에서 대흥안령(스타노보이 산맥)이 바다에 이르는 선을 경계로 남쪽은 중국이, 북쪽은 러시아가 차지한다.
• 우디 강의 남쪽과 대흥안령의 북쪽 사이에 있는 땅은 중립지대로 삼으며, 나중에 다시 협의하여 조정하기로 한다.
• 흑룡강에 접한 아르군 강의 북쪽 연안은 러시아가, 남쪽 연안은 중국이 차지한다.
• 메이렐케 강 하구, 약사의 땅에 있는 러시아인은 모두 퇴거하며, 그 가옥 등은 철거한다.
• 정해진 경계를 사사로이 넘는 자가 있다면 즉시 해당국의 법에 따라 처벌한다.
• 앞으로 경계를 넘는 사람은 통행허가증을 소지해야 한다. 허가증을 가지고 정당한 활동을 하는 외국인은 추방당하지 않는다.
• 과거의 갈등을 모두 잊고, 앞으로 영구히 화평하도록 한다.
이 조약을 흔히 “중국 최초의 국제조약”이라 한다. 중국의 천하사상에 따르면 천하의 모든 땅은 중국 황제의 소유이고 다만 먼 변방의 오랑캐는 조공을 받으며 예의를 가르치는 것이므로, 대등한 주권국가끼리 맺는 약속인 국제조약은 어불성설이었다. 송이 요와 맺은 전연의 맹약만 해도, 실질적으로는 국제조약이었으나 송나라 쪽 표현으로는 “대국인 송이 요를 불쌍히 여겨 베풀어주는 내용”으로 호도되어 있었다.
그런 아전인수식 호도는 네르친스크 조약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희실록] 등에 남아 있는 조약의 한문 기록을 보면 만주본이나 라틴어본에서 상대국을 대등한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대우하는 표현이 빠지거나 윤색되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조약은 중국사에서, 또 동서교류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먼저 청나라는 교섭대표단을 전원 만주족으로만 구성하고 한족을 배제했으며, 교섭문도 원본은 만주어로만 작성했다. 중요한 외교 문제를 한족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경계심도 작용한 결과였겠지만, 한족과 한문이 개입할 때 전형적인 華夷觀과 천하사상이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을 염두에 둔 조치이기도 했다.
청나라는 이 조약을 통해 가르단과 러시아의 동맹을 방지하고, 만주 지역 국경을 확정지었다. 또한 러시아의 확장도 막았으니 청나라는 이득을 본 셈이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로의 세력 확장에 타격을 받았고, 시베리아로의 영토 확장이 상당 부분 정체되었다. 그러나 그 대신 중국과 국경 지대에서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몇 번의 교역에서 러시아는 가죽을 중국에 팔면 큰 이득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러시아 입장에서는 나름 이득이라면 이득이었다.
1689년 오늘 곰과 용으로 상징되는 동서양의 두 거인 사이에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되었다.
[출처]: 러시아 역사 이야기 29. 네르친스크 조약 (『역개루』대한민국 대표 역사 카페) |작성자 고무인간 & 네이버 캐스트 “네르친스크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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