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서 크림반도의 원주민(?)처럼 소개되는 타타르인들은 이른바 크림공화국의 러시아귀속에 반대하는 입장인 모양이다.
1944년 나치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당한 뼈아픈 역사가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이 타타르인들이 마냥 역사의 피해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원주민도 아닐 뿐더러 러시아를 침략했던 몽골 킵챠크 한국의 후예들이 오스만제국 치하에서
이슬람화한 걸 크림 타타르 족이라 칭하는데 이들의 주업은 노예사냥.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란 책을 보면
북아프리카 이슬람교도들이 이탈라이나 프랑스 남부해안 지역을 습격,약탈하고
수많은 기독교도들을 잡아다 소위 목욕장이란 곳에 노예로 팔았던 역사가 소상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슬람교 해적들의 기독교도 노예 사냥은 프랑스 혁명기까지 계속되었으며
심지어 대서양을 건너 미국해안까지 습격해 노예사냥을 했던 것으로 시오노의 책에 나와있다.
-현대라면 미국영토를 기습해 미국인을 납치하는게 말이 될 법하지 않은 얘기고 그런 짓을 벌였다간
토마호크의 뜨거운 세례를 받게 되겠지만, 독립 직후의 신생국가 미국이야기다.-
왜구와 마찬가지인 해적질이지만 이들 나름대로는 기독교도를 상대로한 지하드를 벌인다는 자긍심도 있었다.
크림 타타르 족도 비슷한 짓을 하며 자신들 나름대로의 성전(?)을 벌였는데
이들의 사냥대상은 지금의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촌락에 흩어져살던 슬라브족 양민들.
근 2백여년간 최소 1백만~3백만 명 가량의 백인 노예들을 사냥해서 이슬람권에 갖다 팔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우크라이나가 독립국가를 유지했던 역사도 극히 짧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역사를 분리해서 얘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긴 한데 우크라이나 인들에겐 그 누구도 감당해내지 못할 대 러시아 트라우마가 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즉 홀로도모르는 미국,바티칸,헝가리,리투아니아 등 몇몇 국가에 의해
의도적인 제노사이드로 공식 인정되고 있는데
스탈린의 집단농장화 정책에 대해 구소련에서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로
자영농의 전통이 강했던 우크라이나 지역의 반발이 심하자 스탈린은 이 지역에서 참혹한 인종청소, 행정살인을 감행한다.
손바닥만한 땅이나 염소 한마리만 가지고 있아도 쿨락(부농)으로 몰아 곡식의 종자까지 수탈해갔고 우크라이나 일대를 봉쇄해버린다. 굶주린 사람들이 새를 잡아먹는다는 소식이 들리자 비밀경찰을 동원해 야생동물까지 싹쓸이 한다.
어림잡아 800만에서 1000만명이 굶어죽었고 도처에서 인육을 먹는 참상이 벌어졌다.
매년 11월 마지막 토요일에 우크라이나 대기근 , 홀로도모르 희생자 추모식이 열리는데
곡식을 땅에 뿌리는 의식을 벌이며 굶어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한다.
이 때의 기억이 어찌나 참혹했던지 랜드 오브 데드인가 하는 헐리우드 좀비영화가
우크라이나에서는 상영금지되었다고 한다.
좀비가 사람을 뜯어먹는 장면이 대기근의 악몽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생존한 우크라이나인 상당수는 인육을 먹고 버텼을 확률이 높고 지금의 우크라이나인들은
그 질긴 생명력을 가진 사람들의 자손이다.
독소전이 개전했을 때 진격로에 있던 우크라이나 인들은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열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히틀러에게 있어 슬라브족은 러시아인이건 우크라이나인이건 '절멸'시켜야 할 열등인종에 불과했다.
유태인은 수용소에 집결시켜 재산과 노동력을 짜낼 수 있을 때까지 짜내고 죽인 반면 소련에서의 학살은 더 단순한 것이었다.
아인자츠그루펜이란 학살부대의 무차별 학살에 우크라이나 인들이라고 무사할 순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일부 부역자들은 있었을테고 이들 역시 소련군 반격과정에서 학살당하며 2차대전 기간 중 약 700만명이 더 몰살당한다.
러시아측의 주장대로 서방을 사주를 받은 것인지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자들의 얘기를 그대로 재현한 듯
시위대와 경찰을 모조리 저격하며 소요사태를 확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뉴스에도 많이 나오는 사실이지만 크림반도의 러시아인들은 구소련의 붕괴과정에서 얼떨결에 우크라이나 인이 되었다.
원래 슬라브족이 모여살던 곳이고 제정러시아가 정식으로 진출한 것도 어언 18세기쯤 되니
우크라이나와 엮으려던 흐루시초프의 시도 자체가 애시당초 무리였을지 모른다.
흑해함대의 주둔지로 유명한 세바스토폴. 이미 크림전쟁 때 러시아군 최후의 보루로 버텼던 도시로 이 전쟁에 참전했던
톨스토이가 세바스토폴 연작시리즈를 발표한 것이 유명하다.-크림전쟁은 영국군이 이기긴 했지만 '중기병대의 자살공격' 등 워낙 삽질을 많이 해 '가장 졸렬한 지휘 하에 벌어진 전쟁'이란 내부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남은 유일한 것은 나이팅게일의 간호-
전략요충지답게 2차대전 때도 처절한 격전지가 되었다. operation blau, 즉 청색작전은 러시아 남부 코카서스 유전지대에
전력을 집중하는 것이었고 크림반도는 독일군 주공격로의 길목이었다.
특히 흑해함대 기지가 있는 세바스토폴을 독일군이 내버려둘 리 없었다.
독일군에게 연합군의 랭카서터나 b-17같은 중폭격기가 있었다면 저럴 필요가 없었겠지만, 독일은 이미 1930년대 중반 중폭격기가 산업능력 밖이라는 오판과 함께 생산계획을 접어버렸다. 하지만 제정러시아 때부터 건설된 요새도시가 슈투카 따위에 박살날리 없다. 답이 없다고 생각한 만슈타인 장군은 고전적인 방식, 포격으로 세바스토폴을 파괴하기로 결심한다.
-독일이 구상했던 중폭격기의 이름은 우랄이었단다. 우랄산맥 넘어까지 폭격이 가능할 정도의 폭격기를 계획했지만 오히려 1차대전 공군에이스들이 많이 포진한 나치 수뇌부는 대형항공기가 폭탄을 들이붓는 전략폭격의 개념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독일 입장에선 되로주고 말로 받는 참상이 벌어진다. v로켓까지 포함한 독일의 영국공습 민간인 사망자가 만명을 조금 넘는 반면 백만명이 넘는 독일 민간인이 연합군의 폭격으로 죽었다-
독일군의 구스타프 열차포
하지만 무시무시한 포격에도 수많은 소련군 병사들이 살아남았고 처절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소련은 콤소몰의 소녀들까지 동원해 육박전에 나섰고 이 무시무시한 전투는 수개월을 끌었다. 최단시간 내에 유전지대를 확보한다는 독일군의 전략에도 차질이 생겼는데 어쩌면 세바스토폴에서 벌어준 시간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역전의 발판이 됐을지도 모른다.
수개월을 저항하던 소련군은 요즘 러시아군이 발진해 병력을 이동시키고 있는 케르치로의 철수를 결정한다. 공산혁명의 원조로 자부심이 드높던-영화 전함 포템킨을 생각해보라. 포템킨호는 바로 흑해함대 소속의 군함이었고, 포템킨은 세바스토폴을 건설한 제정러시아 제독의 이름이기도 하다- 흑해함대 소속 해군 수병들은 결사대, 바둑으로 치면 사석을 자청한다. 다른 병력과 민간인이 철수할동안 독일군을 붙잡아두고 전투를 치르다 결국은 전멸당한다.
어쨋든 크림반도의 러시아인들에게 있어서도 이 땅은 처절한 사투로 지켜낸 땅이다.
드네프르강 이동은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땅이었으니
러시아인들 입장에서도 러사아 귀속을 부르짖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하다.
답을 내기 힘든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의 피로맺힌 역사가 돌고 돌고 있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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