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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A

허약체질 이방원 ?

이방원이 정몽주를 쳐죽이고 두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정도전과 이복형제들을 도륙해 무슨 칼잡이가 아닌가 싶지만
이성계 아들 중 유일하게 실력으로 과거에 급제했던 지식인 출신. 

 조선왕조 실록 기록을 보면 체격이나 체질도 아버지 이성계를 닮진 않은 모양.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6월 1일(기사) 5번째기사
정안군이 명나라에 입조하겠다 하니 남재가 따라가기를 자청하다

태조(太祖)께서 정안군(靖安君)에게 일렀다.

“명나라 황제가 만일 묻는 일이 있다면 네가 아니면 대답할 사람이 없다.”

정안군이 대답하였다.

“종묘와 사직의 크나큰 일을 위해서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이에 태조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하였다.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

조정 신하들이 모두 정안군이 위험하다고 하니, 남재(南在)가 말하였다.

“정안군이 만리의 길을 떠나는데 우리들이 어찌 베개를 베고 여기에서 죽겠습니까?”

하고서 스스로 따라가기를 청하였다.





사람죽이기를 밥먹듯하던 명태조 주원장의 고압적인 태도는 사실 그 피폐하던 말기의 고려가 요동정벌을 추진하게 만들 정도로 심한 것이었고 이러한 패악은 조선왕조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던 모양. 

꼬투리 잡히면 사신이고 왕자고 뭐고 때려죽이던 껍질을 벗겨죽이던 할테니 피치못해 아들을 보내지만 
그 아들이 걱정돼 눈물을 흘리는 이성계의 모습이 묘사돼 있다.


근데 4년 후, 그 정안군이  역시 이성계가 사랑해마지 않던 배다른 아들 방번과 방석을 무참히 죽여버림.


전주 경기전의 이성계 어진은 고종 때 복원한 것. 그 이전 함흥 별궁에 보관되던 어진이 바로 저것인데 일제시대에 촬영한 것으로 한국전쟁 때 소실돼 현존하진 않는다. 일단 어깨 벌어진 거 보면, 사거리가 긴 대우전 같은 강궁을 자유자재로 쏘던 장사삘이 물씬난다. 이성계의 전공이야 조선왕조실록이던 고려사던 용비어천가던 태조버프로 과장이 있다는 건 인정해야겠지만, 어쨋든 한국사 넘버원 수준의 활솜씨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 가장 쩔었던 건 어떤 공성전에서 공자인 이성계가 성밑에서 혼자 20여명을 쏴 죽여버리자 적이 질려서 항복한 전투. 사거리 밖에서 백발백중으로 쏴죽이는데 감당할 재간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이성계의 체격이나 무골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은 허수아비 왕으로 알려진 정종. 이성계를 따라서 고려말의 여러 전투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활 잘 쏘고 칼 잘 쓴다고 권력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파리하고 허약한 방원이 아버지를 닮은 강골에 실전경험도 풍부했던 형 방과를 꼼짝못하게 하고 맥없이 왕위를 양도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