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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A

노비타의 임진왜란 감상

이라크 전이 한창일 때 일본웹에서 읽은 글이다.

하드에 저장돼 있던 걸 임진년 기념으로 풀어본다.

임진왜란은 애당초 일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던전쟁이다.

동기부여가 되지못한 전쟁은 초반부터

처절한 학살전으로 전개되는 비극을 보였다.

본문에서처럼 가장 온건하다는 고니시군조차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고 다녔으니

일본에서조차 명성이 자자했던 가토나 시마즈군의 행태는 불을 보듯 뻔했다.

게다가 정유재란 때는 학살이 정책화 되기까지 했다.

한반도에 들어온 가장 호전적인 전투집단과

주자학적 관념론에 빠진 무능한 지배층

명으로 도주할 궁리만 하던 선조 임금...

임진왜란이야 말로 한반도 역사 최대의 비극이었고,

굳이 경중을 따지자면

일제시대보다 더 최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뒷쪽에 일본어 원문

200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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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에 의한조선 출병 「공허한 전쟁」~

...

그런데 , 이라크가 대단한 것이 되고 있네요. 나는 , 미군의 여성 병사가 이라크인 포로를 학대하고 있는 사진을보고 , 매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남성이므로 , 여성이 저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 역시 , 쇼크이지요
...

내가 아는 한 , 여성이 포로를 알몸으로 해 폭행을 하다니. 역사상 사례를 모릅니다. 지금부터 1900년전 , 로마 황제 트라이아누스가 다키아인과 싸운

「다키아 전쟁」때 , 그런 것이 있었다고 하네요.

아무튼 , 그것은 접어두고 , 미국에 의한 이라크 점령 정책은 완전하게 파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는 일본은 , 미국에 대해서 강한 태도로 , 강요하고 방향으로 이끌어 줄 필요가 있겠지요. 그것이야말로 , 진정한 동맹국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 일본도 ,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오늘은 , 일찌기 일본이 실시한 침략전쟁과 그 점령 정책 , 그리고 포로에

대한학대에 대해 말하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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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데요시에 의한조선 출병 「개전 전야」~

지금부터 약400년전의 이야기이다
.

칸토의 대영주인 호조씨를 넘어뜨려 , 거의천하 통일을 완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 엄하게 중국 정복을 선언했다. 잘 오해 받고 있지만 ,

히데요시는 조선 정복을 목표로 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중국 정복을 꿈꾸고 있어조선 출병은 중국 정복의 프로세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 일본에 와 있던 크리스트교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즈는

저작 「일본사」에서 , 히데요시의 중국 정복 선언이 이하였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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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일본 전국의 유일한 군주이다
.
그리고 , 중국 정복 이외로 내가 이루어야 할 일은 남아 있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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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히데요시의 야망에 반대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히데요시의 남동생이며 , 도요토미 정권의 넘버 2에 있던 도요토미 히데나가는사력을 다해 히데요시의 야망에 반대했다고 한다. 노부나가의 가신인 마에노씨가 남긴 기록 「무공야화」에는 , 그 때 ,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말했다고 여겨지는 말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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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통일을 완수한 현재 , 우리는 국내의 정치에 주력 해야 한다. 외국과 전쟁 등은 , 당치도 않은 폭동이다. 그것보다 외국과 사이좋게 지내 , 무역으로 이익을 주는 것이 제일일 것이다
.

외국을 정복하지 않으면 부하들에게 더 이상 ,

새로운 영지를 줄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면 , 나의 영지를 깎아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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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나가는 인격자이며 , 온화한 인품으로 많은 무장에 존경받고 있었다. 그가 히데요시보다 장수했다면 , 도요토미 정권이 이에야스에 빼앗기는 것은 없었으리라 말해지고 있다.


당시 , 히데요시에과감히 반대를 주창할 수가 있던 것은 , 그 밖에 없었다.

그러나 , 운명은 짓궂다. 히데요시보다 먼저 , 남동생인히데나가가 죽었던 것이다. 그것은 , 이제 히데요시의 광기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진 것을 의미했다
.

            
         

히데나가의 사후 , 히데요시는 재차 중국 원정을 선언했다.
루이스
·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의하면 , 그 선언은 이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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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왕이다. 중국 원정을 개시해. 만일 , 너희가 전투로 목숨을 잃었다고 해도 , 그것은 영원히 기념되고 찬미되니 ,죽음의 괴로움을즐거이받아들이라
.

비록 나의 아들(병사한 츠루마츠) 이 소생해 , 눈물을 흘려 이 원정을 단념시키려고탄원해도 , 나는 결코 들어주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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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 히데요시는 완전하게 미치고 있었다.

젊은시절 , 노부나가에 의해 학살을 명 받고「나는 살인이 싫다」라고 편지에 쓴 적도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너그로운 그는 도대체 어디에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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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의 쾌 진격 「부산성의 비극」~

문록 원년(1592) ,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일본군은 바다를 건너 , 한반도의 부산

으로 상륙했다. 사상 유명한 「문록의 역 」의 시작이다. 상륙 후 , 일본군은

부산성을 목표로 해 , 3시간만에 함락 시켰다.

이 때 , 고니시 유키나가가 인솔하는 일본군은 , 부산의 마을을 다 태워 ,

성병은물론 포로나 일반 시민까지 , 가차 없이 학살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요시노심 고자에몬각서」는 이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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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사람들은 , 모두 무릎 꿇어 , 손을 모았다. 그들은 「뭐라뭐라 」

들은적 없는 말을 했지만 , 살려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틀림없었다.

그러나 , 우리는 그것을지 않았다
.
우리는 「군신에게로 희생의 제물이다!」라고 말해 , 남녀의 구분없이 ,

베어 죽이고 , 밟아 죽였던 것이다. 잘라 떨어뜨린 목은 , 3만 정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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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도 일본군은 쾌 진격을 계속했다. 눈 깜짝할사이 서울을 함락시키고

얼마 후엔 평양까지도 점령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 일본군의 점령 정책은 심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조선 각지로부터 식량을 전부 모았고 그 때문에 ,

조선 국민은 굶주림에 괴로워했다. 굶은 민중들이 ,

일본병에게 식량을 요구했지만 , 그것을 베어 버렸다고 하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러한 점령 정책이 잘될 리가 없다.


그리고 , 그 후 , 일본군의 쾌 진격은 멈추어 , 고전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먼저 말했지만 히데요시의 야망은 「조선 정복」이 아니고 ,

「중국 정복」이었다.

그는 설마 조선 정복에 , 이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고 ,
이 정도로 일본군이 고전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

그리고 , 격노한 히데요시는 , 드디어 , 무서운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
조선측의 기록인 「난중잡록」에는 , 그 명령이 기록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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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을 몰살시키고 , 조선국을 공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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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측의 기록에서도 히데요시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 조선인을 몰살하라」라고 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히데요시의 이 발언은 사실일 것이다.

그의 광기는 , 히틀러의 광기와 매우 비슷하다. 그리고 , 크리스트교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 그런 히데요시를 「폭군」이라고 기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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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로에게로의 대우 「일본인의 죄와 아쉬움」~

여기에 1권의 서적이 있다
.
그 이름은 「간양록」. 조선의 유학자 , 강항의 저작이다
.

유학자인 강항은 비전투원임에도 불구하고 , 일본군에 잡혀 일본에 연행되었다. 그가 그 때의 체험을 기록했던 것이 , 이 「간양록」이다
.

            
         

강항이 포로가 되었을 때 , 그의 어린 아이들은 ,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이하 , 「간양록」으로부터 의 발췌 인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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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군을 피해 배로 도망치고 있는 중에 , 잡혔다
.
왜병은 , 어린 아들과딸을 , 물 속에 내던졌다.

두아이가 수중으로부터 울부짖는 소리가 귀를 찢는 듯 했지만

, 그것도 잠시, 바로 끊겨 버렸다.

나는 나이 30에, 겨우 아들을 얻었던 것이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 , 나는 꿈을 꾸었다. 용이 수중에 떠 있는 꿈이었다
.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용」이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

그 때 , 도대체 누가 , 자신의 아들이 물 속에서 죽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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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비통하다. 나는 「간양록」의 이 일문을 읽고 , 울었다.
전쟁은 불행하고 , 비극이다. , 부모가물 속에자신의 아이가 내던져지는

모습을 보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 후 , 포로가 된 강항은 , 에히메현에 연행되었다.

식사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채 , 걸었던 그는 , 지나친 피로로,

강을 건너는 도중 ,물 속에 넘어져 버렸다.

그 때의 모습을 ,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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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중에 넘어진 채로 , 힘이 없는 것이니까 ,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자

강가에 있던 일본인 한 명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도와 주었다.
그리고 ,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아!어떻게 이런 심한 일을! 

 히데요시님은 이 사람들을 잡아 와 , 도대체 무엇을 시키자고 하는 것인가.
 어째서 천도가 없는 것일까.


그리고 , 그 일본인은 서둘러달려가 , 식사와 차로 , 나를 대접해주었다.

일본인 중에도 , 이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전장에서 살인을 기뻐한다는 것도 ,

법령이 그들을 그렇게 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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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글을 읽고 , 나는 구원받았다
.

나는 「간양록」을 읽고 있는 동안 , 일본인의 악역 비도상을 봐 ,

자신이 일본인인 것이 괴로웠다.

그러나 , 동포들이 학살되고 아이가 물 속에 버려지고

스스로도 학대를 받은 강항이 「일본인 중에도 , 이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들이 전장에서 살인을 기뻐한다는 것도 , 법령이 그들을 그렇게 시키고 있는 것이다」라고 써 주었던 것이다.

나는 한 명의 일본인으로서 그에게 감사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 그에게 사죄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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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에 「공허한 전쟁」~

여기까지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조선 출병에 대해 , 여러가지 말했다
.
결국 , 이 전쟁은 , 히데요시의 사망에 의해 종료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철병을 결의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 에 걸친 전쟁 중에서 , 일본측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아니 , 증오와 슬픔을 얻었다고 해야할 것인가
.

그러나 , 당시에 있어서도 ,조선 출병에 진심으로 찬성하고 있던 일본인은 ,

매우 소수였던 것이다. 「무공 야화」는 ,조선 출병에 대해 , 이렇게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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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공허한 전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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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의한 이라크 점령은 , 지금 확실히 「공허한 전쟁」으로 돌입하고 있다.
이대로 좋은 것이 없다. 누군가가 멈추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리고 , 그 누군가란 , 일찌기 「공허한 전쟁」을 경험한 일본에서나오기를 , 나는 열망한다.

★200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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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秀吉による朝鮮出兵「空虚な戦争」~

みなさん、おはようございます。ノビタです。

今日は私の誕生日です もう32歳になっちゃいました。このサイトをはじ
めたのは、私が28歳の時でしたが、時間の流れは早いですねぇ。。。

さてさて、イラクが大変なことになっていますね。私は、米軍の女性兵士が
イラク人捕虜を虐待している写真を見て、とても衝撃を受けました。僕は男
性ですので、女性があんなことをしているのを見ると、やっぱり、ショック
なんでしょうねぇ。。。

私が知る限り、女性が捕虜を裸にして暴行を加えるなんて、歴史上で一つし
か事例を知りません。今から1900年前、ローマ皇帝のトライアヌスがダキア
人と戦った「ダキア戦役」の時、そういうことがありました。

まぁ、それはさておき、米国によるイラク占領政策は完全に破綻しているよ
うに思います。米国と同盟関係にある日本は、米国に対して強い態度で、正
しい方向へと導いてあげる必要があるでしょう。それこそが、真の同盟国の
姿だと思うのですが。。。

しかし、過去にさかのぼれば、日本だって、同じようなことをしています。
今日は、かつて日本が行った侵略戦争とその占領政策、そして捕虜に対して
行った虐待について述べようと思います。


   ※∞∞※∞∞※∞∞※∞∞※∞∞※∞∞※∞∞※∞∞※∞∞※


~秀吉による朝鮮出兵「開戦前夜」~

今から約400年前の話である。

関東の大大名である北条氏を倒し、ほぼ天下統一を果たした豊臣秀吉は、厳かに中国征服を宣言した。よく誤解されているが、秀吉は朝鮮征服を目標としていたのではない。彼は中国征服を夢見ており、朝鮮出兵は中国征服のためのプロセスにすぎなかったのである。

当時、日本に来ていたキリスト教宣教師ルイス・フロイスは著作「日本史」の中で、秀吉の中国征服宣言が以下であったと記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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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は今や日本全国の唯一の君主である。
そして、中国征服すること以外に私がなすべき仕事は残されてい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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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〆    〆    〆 

この秀吉の野望に反対した者はいなかったのであろうか。
いたことはいたのである。

秀吉の弟であり、豊臣政権のナンバー2にあった豊臣秀長は死力をつくして
秀吉の野望に反対したという。信長の家臣である前野氏が残した記録「武功
夜話」には、その時、豊臣秀長が語ったとされる言葉が残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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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統一を果たした現在、我々は国内の政治に注力すべきだ。外国と戦争す
るなどは、もってのほかの暴挙である。それよりも外国と仲良くし、貿易で
利益をあげることが第一であろう。

外国を征服しないと、部下たちにこれ以上、新しい領地を与えることができ
ないというが、それならば、私の領地を削って与え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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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臣秀長は人格者であり、その温和な人柄から多くの武将に慕われていた。
彼が秀吉よりも長生きしていれば、豊臣政権が家康に奪われることはなかっ
たとも言われている。

当時、秀吉に遠慮なく反対を唱えることができたのは、豊臣政権のまとめ役
であった彼しかいなかった。

しかし、運命は皮肉である。秀吉より先に、弟である秀長が死んだのだ。
それは、もはや秀吉の狂気に反対する者がいなくなったことを意味した。

            〆    〆    〆 

秀長の死後、秀吉は改めて中国遠征を宣言した。
ルイス・フロイスの「日本史」によると、その宣言は以下であったとい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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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は日本国王である。私に従い中国遠征を開始せよ。万が一、お前たちが戦
いで命を落としたとしても、それは永遠に記念され、賛美されるのだから、
お前たちは死の苦しみですら甘んじて受けよ。

たとえ私の息子(幼少で病死した鶴松)が生き返り、涙を流してこの遠征を
断念させようと私に嘆願しても、私は決して聞き入れはせ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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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時、秀吉は完全に狂っていた。若い頃、信長に虐殺を命じられ「私は人
殺しが嫌いだ」と手紙に書いたこともある豊臣秀吉。寛容であった彼は一体
どこにいったのか。


   ※∞∞※∞∞※∞∞※∞∞※∞∞※∞∞※∞∞※∞∞※∞∞※


~日本軍の快進撃「釜山城の悲劇」~

文禄元年(1592年)、秀吉の命を受けた日本軍は海を渡り、朝鮮半島の釜山
へと上陸した。史上名高い「文禄の役」のはじまりである。上陸後、日本軍
は釜山城を目指し、たった3時間で釜山城を陥落させた。

この時、小西行長が率いる日本軍は、釜山の町を焼き払い、城兵はおろか捕
虜や一般市民まで、容赦なく虐殺したという。その様子を「吉野甚五左衛門覚書」は以下のように描写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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釜山の人々は、皆ひざまずいて、手を合わせた。彼らは「まのらまのら」と
聞いたことのない言葉を話したが、助けてくれと言っているのに違いない。

しかし、我々はそれを聞かなかった。
我々は「軍神への血祭りだ!」と言って、男女の区別なく、斬り殺し、踏み
殺したのである。切り落とした首は、三万ほどを数えたであ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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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〆    〆    〆 

その後も日本軍は快進撃を続けた。あっという間にソウルを陥落させ、さら
には平壌までも占領してしまったのである。

しかし、日本軍の占領政策はひどいものであった。日本軍は朝鮮各地から食
糧を根こそぎかき集め、そのため、朝鮮国民は飢えに苦しんだ。飢えた民衆
たちが、日本兵をおがんで食糧を求めたが、それを斬り捨てたという記録も
残っている。

このような占領政策がうまくいくはずがない。
そして、その後、日本軍の快進撃は止まり、苦戦を強いられるのである。

            〆    〆    〆 

先に述べたが秀吉の野望は「朝鮮征服」ではなく、「中国征服」であった。
彼はまさか朝鮮征服に、これほど時間がかかるとは思ってもみなかったし、
これほど日本軍が苦戦するとも思っていなかった。

そして、激怒した秀吉は、とうとう、恐るべき命令を下したのである。
朝鮮側の記録である「乱中雑録」には、その命令が記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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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人を皆殺しにし、朝鮮国を空き地にせ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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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側の記録にも秀吉が「老若男女を問わず、朝鮮人を皆殺しせよ」と命じ
たとあるため、秀吉のこの発言は恐らく事実なのであろう。

彼の狂気は、ヒトラーの狂気と非常に似ている。そして、キリスト教宣教師
ルイス・フロイスは、そんな秀吉のことを「暴君」と書き残したのである。


   ※∞∞※∞∞※∞∞※∞∞※∞∞※∞∞※∞∞※∞∞※∞∞※


~捕虜への待遇「日本人の罪とやさしさ」~

ここに一冊の書物がある。
その名は「看羊録」。朝鮮の儒学者、姜沆の著作である。

儒学者である姜沆は非戦闘員でるにも関わらず、日本軍に捕らえられ、日本
に連行された。彼がその時の体験を記録したのが、この「看羊録」である。

            〆    〆    〆 

姜沆が捕虜になった時、彼の幼い子供たちは、日本軍によって虐殺された。
以下、「看羊録」からの抜粋引用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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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は日本軍を避け、船で逃げている最中に、捕らえられた。
日本兵は、幼い息子と娘を、水中に投げ捨てた。二人が水中から泣き叫ぶ声
は耳に痛々しかったが、それもしばらくしたら、絶えてしまった。

私は30歳にして、やっと息子を得たのである。
妻が妊娠した時、私は夢を見た。竜が水中を浮いている夢であった。
だから私は息子の名前を「竜」と名づけたのである。

その時、一体誰が、自分の息子が水中で死ぬなぞと思ったであろう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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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まりにも悲痛である。私は「看羊録」のこの一文を読み、涙した。
戦争は不幸であり、悲劇である。なぜ、親が、水中に自分の子供を投げ捨て
られる姿を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

            〆    〆    〆 

その後、捕虜となった姜沆は、愛媛県に連行された。食事も満足に与えられ
ないまま、歩き続けさせられた彼は、あまりの疲労からとうとう、川を渡る
途中、水中で倒れてしまった。

その時の様子を、彼はこう述べ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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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は水中に倒れたまま、力がないものだから、起きあがれなかった。すると
川岸にいた一人の日本人が涙を流しながら駆けつけ、私を助けてくれた。
そして、その日本人はこう言ったのである。

「ああ!何とひどいことを! 
 秀吉様はこの人たちを捕らえて来て、一体何をさせようというのか。
 どうして天道がないわけがあろうか。」

そして、その日本人は急いで家に走って戻り、食事とお茶で、私をもてなし
てくれたのである。

日本人の中にも、こういうような心を持っている人がいるのだ。彼らが戦場
で殺人を喜ぶというのも、法令が彼らをそうさせている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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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後の一文を読んで、私は救われた。

私は「看羊録」を読んでいる間、日本人の悪逆非道ぶりを見て、自分が日本
人であることが苦しかった。

しかし、同胞たちが虐殺され、子供を水中に捨てられ、自らも虐待を受けた
姜沆が「日本人の中にも、こういうような心を持っている人がいるのだ。彼
らが戦場で殺人を喜ぶというのも、法令が彼らをそうさせているのである」
と書いてくれたのである。

私は一人の日本人として、彼に感謝したいと思う。
そして、彼に謝罪したい。


   ※∞∞※∞∞※∞∞※∞∞※∞∞※∞∞※∞∞※∞∞※∞∞※


~最後に「空虚な戦争」~

ここまで、豊臣秀吉の朝鮮出兵について、いろいろと述べてきた。
結局、この戦争は、秀吉が死んだことによって終了する。徳川家康が撤兵を
決意したのである。

長年に渡る戦争の中で、日本側が得たものは何もなかった。
いや、憎悪と悲しみを得たというべきか。

しかし、当時においても、朝鮮出兵に心から賛成していた日本人は、ごく少
数であったのである。「武功夜話」は、朝鮮出兵について、こう評価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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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ことに空虚な戦争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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米国によるイラク占領は、今まさに「空虚な戦争」へと突入している。
このままで良いわけがない。誰かが止めなければならない。

そして、その誰かとは、かつて「空虚な戦争」を経験した日本であって欲し
いと、私は熱望す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