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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 지역소식

들불처럼 번지는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

들불처럼 번지는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
'SNS시대의 아날로그적 분노'
국정원사태ㆍ철도민영화… 일일이 실명 손글씨
"우리가 침묵한다면 앞날이 안녕하시겠습니까?"
입력시간 : 2013. 12.19. 00:00



 

18일 오전 광주 동구 서석동 조선대 후문 인근 담벼락에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30여 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훼손을 우려한 때문인지 대자보 겉면엔 비닐막이 씌워졌고, 철사로 단단히 고정돼 있었다. 학생들이 실명을 밝히고 일일이 자필로 쓴 대자보에는 국정원 대선 개입, 철도 민영화 등 사회 현안부터 등록금, 취업 등 개인 문제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겼다. "안녕하지 못한 사회, 안녕함으로 만날 수 있도록 모두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 "사회에 무관심하고 방관하며 침묵한다면 앞날이 안녕하시겠습니까?", "제 자신이 부끄러워 펜을 들었다" 등이 눈길을 끌었다. 일부 문장엔 빨간색 펜으로 밑줄을 그어 강조하기도 했다.

시험기간임에도 걸음을 멈추고 상당시간 대자보를 살펴보는 학생들이 여럿 목격됐다. 대자보를 한참동안 읽던 임소정(21ㆍ여ㆍ미대 서양학과)씨는 "자필로 쓰여진 대자보를 보며 진실이 담겨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 있던 답답함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 아니겠냐"며 "대자보를 읽으면서 우리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같은 시간 전남대 인문대 주변에서 대자보를 읽고 있던 경영학과 07학번 학생은 "우리 학교에도 많은 대자보가 붙어 있어 놀랐다"면서 "대자보 사진을 찍은 후 페이스북에 게재해 보다 많은 친구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자보를 계기로 조직적인 학생운동으로 번질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조선대 총동아리연합은 20일 대자보 관련 사안에 대해 성토대회를 개최키로 했다.

조선대 총동아리연합회장 황인용(24ㆍ문예창작학과)씨는 "조금은 두렵지만 함께 힘을 모아 서로의 생각들을 나눠볼 것이다. 학점과 스펙관리도 중요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 나섰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조선대 정치외교학부 공진성 교수는"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드러낸 채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오프라인 형태의 대자보가 SNS(Social Networking Service)와 결합하면서 급속도로 확산된 것 같다"면서 "대자보는 '안녕'이라는 근본적인 단어로 시작해 누구나 공감할만한 사안을 글로 풀어갔다. 이벤트성으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장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박수진 기자 sjpark1@jnilbo.com

취업난ㆍ양극화ㆍ민주주의 위기…'안녕 못한' 삶 토로
'안녕들 하십니까' 무슨 내용 담겼나
사회현안 무관심한 채
직장잡기 위해 앞만 봐
철도파업ㆍ밀양 송전탑
입력시간 : 2013. 12.19. 00:00


광주지역 대학에 '안녕들 하십니까'대자보 신드롬 불고 있는 가운데 18일 조선대 학생들이 후문 인근에 내걸린 대자보를 보고 있다. 배현태 기자 htbae@jnilbo.com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에 대해 지역 대학생들의 응답이 이어지고 있다. 대자보에는 취업ㆍ경제난 등 개인적인 삶의 고충을 토로하는 것에서부터 각종 사회 현안까지 다양한 주제들이 다뤄지고 있었다.

●취업의 무거움 안녕 못해

대자보에는 입시경쟁-학점경쟁-취업경쟁에 지친 대학생들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경제난과 양극화, 무한경쟁, 취업난과 미래 고용불안, 치솟는 등록금에 시달리는 대학생들은 '생존'의 두려움 앞에 서 있었다.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기에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취업 5종 세트'니 '8종 세트'니 하는 스펙 쌓기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신음했다.

전남대 철학과 08학번 정모씨는 대자보를 통해 "사회는 우리에게 꿈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비싼 등록금은 요지부동이고 아르바이트에서 최저 임금을 받는 것은 먼나라 이야기다"고 토로했다.

정씨는 "우리는 불확실한 꿈을 위해 모험하기보다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는 꿈만을 위해 도전한다"며 "대학에서는 매일 휴대전화로 기업입사 설명회와 같은 문자만 전송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우리는 우리의 선배, 아버지, 어머니가 피와 목숨으로 일궈놓은 세상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천덕꾸러기로 낙인찍혔다"며 "선배가 일궈놓은 세상은 왜 우리를 지치게 하는가. 그들이 만들어낸 문제를 어째서 우리가 해결하기 바라는가 묻고 싶다"고 썼다.

정씨는 "살기위해 다시 도서관으로 간다"며 20대 대학생의 고단함을 토로했다. 사회 양극화는 대학생들의 어깨에도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었다. 익명으로 대자보를 붙인 전남대 철학과 학생은 "시간당 5000원을 벌고자 아등바등하는 내 모습을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 '미안하다'며 아르바이트 급여를 빌리는 어머니를 보면 더 모르겠다"며 "우리의 부모는 왜 미안해야 하는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적었다.

●사회에 침묵… 이제 그만

철도노조 파업, 밀양 송전탑 건설 강행,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등 사회 현안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좁아진 취업문을 뚫기 위해 자기계발에만 몰두했던 대학생들은 지금의 사회 문제가 훗날 자신의 일이 될 수 있다는 데 눈을 떴다. 이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사회에 무관심했던 모습을 반성하며 '연대'를 통해 사회를 안녕하게 만들자고 한목소리를 냈다.

비판의 목소리에 색깔론을 뒤집어씌우는 정치권, 침묵하는 언론을 고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관심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봤다.

대자보를 쓴 이후에도 자신들은 여전히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아야 하지만 여기에 덧붙여 주위도 함께 살핀다면 사회는 조금씩 정의로워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조선대 운동과학전공 박모씨는 "정치는 나와는 먼 이야기로 여긴 채 '내가 신경쓴다고 달라지겠어, 기말고사나 잘 봐야지'라고 생각하며 참으로 안녕했다"며 "고려대생의 첫 대자보에 이어 후배들의 대자보 소식과 심지어 고등학생들의 참여소식은 내가 창피한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줬다"고 고백했다.

그는 "철도노조가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7600명의 근로자들이 직위해제를 당했다. 조선대도 현재 청소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있다. 밀양송전탑 건설 반대 현장, 의료민영화 등 많은 사건이 있지만 언론들은 왜 북한 장성택의 처형사건만 보도중인가"라며 "우리의 관심하나하나가 언론과 정부의 침묵을 끊고 국민 앞에 말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며 모두의 관심을 촉구했다.

전남대 일문과 07학번 학생은 "졸업하고 사회로 첫 발을 내딛는 우리에게 비정규직, 고시, 백수라는 선택지만 있다. 그로 인해 우리 세대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배제에 대한 공포로 인해 정의롭기가 힘들었다"며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지금,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학생과 노동자들이 연대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꾸자"고 썼다.

조선대 한 학생은 "국가기관에서 선거에 직접적으로 개입해 민주주의를 흔들었다"며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국민을 위한 인프라'를 민간 기업에 팔아넘겨 돈벌이로 전락시키려하고 이에 저항하는 코레일 직원 7600여명을 직위해제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비상식적인 것들이 상식으로 둔갑하고 과거의 뼈아픈 역사를 향해 역행하고 있다"며 "유신정권에 맞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던 저항 시인의 정신마저도 무너져버린 지금이,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실상이다"고 성토했다.

조선대 기계공학과 나모씨는 "이제는 종교인들에게까지 빨갱이라고 몰아간다. 민주화의 성지 광주에 살면서도 당장 내 앞길만 생각하며 지냈던 것이 부끄럽다"며 "사회에 일어나는 것에 무관심하고 방관한다면 몇 년 뒤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앞만 보지 말고 한번쯤 주위를 둘러보자"고 밝혔다.

김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