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개혁·진보’가 18세기 실학에 있나 … 봇물 터진 의문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① 프롤로그 - 실학과 근대
20세기 한국학의 기둥 '실학'에 대한 의문이 이어진다.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 성찰적 문제제기다.
한국 학계의 20세기는 ‘실학(實學)의 시대’였다. 실학은 근대화의 학술적 표현이었다. ‘서양 따라잡기’의 또 다른 양식이기도 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 지금까지 70여년간, 대한제국기부터 치면 120여년간 우리 민족이 서양을 배우면서 이룩해내려고 애써온 그 목표가 근대화였다. 온 백성의 자유와 평등, 시장화와 산업화는 근대화의 목표들이었다. 1977년 수출 100억불 달성은 근대화의 한 축인 산업화의 성공을 상징했다. 1987년 6월항쟁은 근대화의 또 다른 한 축인 국민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화의 약진을 상징한다.
실학은 서양식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우리 민족 고유의 내재적 역량으로 간주됐었다. 서양 근대 문명의 충격을 우리가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해낼 자체적 능력을 조선 후기부터 스스로 배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7~18세기에 반(反)주자학적인 유학자들이 나와서 주자학의 도덕과 의리만 얘기한 것이 아니라 시무(時務), 즉 정치경제와 실용 등 우리 일상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학문을 본격 거론하기 시작했다.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이 주도한 새로운 흐름을 ‘실학’이라고 불렀고 그들은 실학파로 규정됐다. 그런데 이 같은 실학이라는 학술 장르로서의 개념이 18세기 당시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조선학운동을 펼친 정인보·안재홍 등이 유형원·이익·정약용 등을 실학파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근대화는 국가의 전략 목표로 설정되면서 실학은 더욱 강조되었다. 실학은 한국 근대화의 토대를 놓은 사상으로 격상되었다. 국민들은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해, 학계에선 실학을 규명하기 위해 매진했던 셈이다. ‘근대적’ ‘개혁적’ ‘진보적’ 등 온갖 좋은 형용사는 다 실학 앞에 붙곤 했다.
‘진정한 실학’ 바람이 ‘가짜 실학’ 비판
그렇다면 세계가 놀랄만한 속도로 매우 신속하게 근대화를 이뤄낸 성공 잔치의 학술적 주인공은 당연히 ‘실학’이 되어야 할 텐데 상황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초대장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근대화 성공의 팡파르가 울릴 때부터 역설적으로 실학을 언급하는 이들은 줄어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초중고 교과서에 실학은 중요한 항목으로 설정돼 있고, 각종 시험에도 출제되고 있지만, 실학을 연구해온 전문가들에게서 실학 개념에 대한 회의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강명관(부산대 한문학) 교수는 지난해 12월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휴머니스트)이란 책을 펴냈다. 강 교수는 실학이 “조선후기 사족체제의 자기조정 프로그램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올해 들어 2월에는 황태연(동국대 정치외교학) 교수가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청계)을 출간했다. 황 교수는 “실학자라고 거명되는 이들의 주장은 알고 보면 근대적 주장이기는커녕 복고적 봉건주의 논변들이었다”고 비판했다. 3월 들어선 노관범(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한국사) 부교수가 『역사비평』(2018년 봄호)에 글을 기고하며 실학이란 용어 자체의 무용성을 주장했다. 노 교수는 “정의로운 학문을 ‘의학(義學)’이라 하지 않고, 어떤 학문이 용감하다고 해서 그 학문을 ‘용학(勇學)’이라 하지 않듯이, 어떤 학문이 실사구시를 한다고 해서 그 학문을 실학(實學)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한문학·정치사상·한국사 분야에서 모두 실학 개념을 잇따라 비판하고 나선 셈인데, 이는 최근에 갑자기 불거진 현상만은 아니다. 국내에서 실학 개념에 대한 최초의 비판은 1990년 김용옥 전 고려대 철학과 교수가 『독기학설(讀氣學說)』(통나무)이란 책을 펴내면서다. 김 교수는 “실학은 역사적 사실로서의 실존태가 아니라 20세기 중엽 한국 역사학계에서 발생한 역사서술론적인 개념”이라고 지적했다. 이 책은 당시 5만부가 판매됐다고 한다. 필자도 기자가 되기 1년 전인 그 해에 그 책을 사 본 추억이 있다. 20대 젊은 시절의 잊지 못할 ‘지적 충격’이었다.
김용옥의 주장에 당시 학계에서는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응답이었다. 이런 류의 책이 5만부 나갔다면 관련 분야에서 볼만한 사람은 거의 다 봤다는 얘기일 수 있는데, 논문이나 저서의 참고도서 목록에 올려놓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해방 이후 한국학 분야 제1의 목표는 식민사관 극복이었다. 실학은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근거였다. 그런데 김용옥은 실학 개념의 연원을 일본의 근대관과 연결시키면서 식민사관에 습윤되었을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설정한 실학이 도리어 ‘식민지 프레임’에 물든 개념일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1990년의 실학 비판과 2018년의 실학 비판 분위기를 비교하면서 전환기의 공통점을 감지하게 된다. 1990년에는 또 다른 거대한 지적 충격이 외부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이었다. 1980년대 대학가와 지식사회를 휩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사회주의 관련 책도 읽은 이들에게는 요즘 말로 ‘사상적 멘붕’의 시대였는데, 그런 시대적 변화의 흐름과 함께 실학 비판도 제기되었던 것이다.
2018년의 ‘실학 비판’은 어떤가.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사태에 이어 ‘미투 혁명’에 이르기까지 각종 ‘적폐 청산’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과 북한의 사상 첫 정상회담도 예견되는 상황이다. 이렇게 거대한 시대적 전환의 시기에 우리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담보할 ‘진정한 실학’을 희구하는 바람이 기존의 ‘가짜 실학’을 비판하는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실학 개념의 타당성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는 점차 다양한 모습으로 확산되었다. 지난 2006년 7월 12일 한림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실학의 재조명’을 주제로 연 학술대회는 일종의 중간 점검 성격을 띠었다. 실학 개념에 대한 혼란이 확산되자 학계에서도 정리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한영우(서울대 국사학) 명예교수가 교통정리에 나섰다. 당시 한 교수는 두 가지로 실학 개념을 재정리했다. 첫째 실학은 성리학(주자학)과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학문이 아니라고 했다. 제도개혁과 실용성을 추구한 실학은 일종의 ‘실용적 성리학’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근대와 봉건을 기준으로 실학과 비실학을 나눠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실학=반(反)주자학=근대’라는 공식이 실학의 본질적 특성으로 간주되어 왔었는데 그런 특성이 모두 무화된 셈이다. 그럼에도 실학이란 용어를 폐기할 것까지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사회를 변화시기려는 개혁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조선 후기는 서양의 봉건사회보다는 한층 앞서가는 사회이고, 서양의 근대사회보다는 산업구조가 뒤떨어진 사회였다”고 하면서 이 같은 조선 후기의 특징을 “근세적 유교사회”라고 재정의했다. 근세는 ‘초기 근대(Early Modern)’를 의미하는 학술용어다.(한영우 외, 『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 푸른역사, 2007, 25~62쪽)
유형원·이익·정약용, 그들은 무얼 지향했나
이런 흐름 속에서 실학 비판은 더욱 심화되기 시작했다. 2014년 김영식(서울대 동양사) 명예교수가 펴낸 『정약용의 문제들』(혜안)은 실학 비판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했다. “정약용의 ‘개혁적’ ‘진보적’ 심지어는 ‘근대적’ 면모에 대해서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김 교수는 “정약용은 개혁적이기보다는 보수적이었으며 그가 내놓은 개혁 방안들이 ‘근대적’ 사회를 지향하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실학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통설이 깨지고 있다. 신화의 종언이다. 18세기 실학자들이 살았던 시대가 어떤 시대였고 그 실학 사상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제 제대로 분석되어야 할 때다. 2018년의 시점에서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실학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실학의 흐름 자체가 없었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그 이전의 정통 성리학자들과 다른 면모가 그들에겐 있었다. 그들이 함께 모여 조직적인 운동(movement)을 벌인 것은 아니지만,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을 스승으로 생각하면서 그때까지 정통 성리학자들이 하찮은 것으로 격하했던 정치경제와 일상적 시무에 관한 실용적 제안을 본격적으로 내놓았다. 그런 흐름은 대한제국 시기에 정약용의 저서를 읽고 영향을 받은 이기(1848~1909·애국계몽운동가)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들이 보여준 일종의 새로운 학풍을 실학이라고 불러도 좋고 그 어떤 이름을 붙여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세상을 바꾸자고 내놓은 제안이 정작 무엇을 지향했는가이다.
주자학과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보이면 ‘근대’의 딱지를 붙이며 옹호하는 것은 일종의 이분법적 ‘진영 논리’다. 주자학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주자학과 조금이라도 다른 얘기를 한다고 다 옳은 얘기는 아니라는 얘기다. 이것은 복잡하고 미묘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21세기 실학’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18세기에 존재했던 실학은 과연 근대적인가.
‘실학’이란 말은 ‘허학’을 꼬집는 보통명사였다
실학(實學)은 대개 17~18세기 조선 후기에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롭게 등장한 실사구시의 학풍. 즉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비판하며 실제 생활에 유용한 대안을 제시하는 학술 경향으로 알려져 있다. 유형원·이익·정약용과 북학파(박지원·홍대용·박제가) 학자들이 이런 흐름을 주도했으며 이들을 실학파로
분류한다.
그런데 실학이란 말은 조선 후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허학(虛學)과 대비되며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용어였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하면서 불교나 노장사상을 허학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실학이 마치 조선 후기의 고유명사인 것처럼 규정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1930년대 조선학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됐고, 해방 이후에는 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와 맞물려 주체적 한국학 수립의 디딤돌로 활용되었다. 20세기 실학 개념의 형성사 자체가 21세기 한국학의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자문 전문가=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김영식 서울대 명예교수,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 황태연 동국대 교수, 강명관 부산대 교수, 장득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부교수.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② 실학과 토지공개념
21세기 첨단산업시대에 토지공개념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조선시대 정전론(井田論)을 연상케 한다. 비현실적 이상론만 거론해 현실적 대안은 봉쇄하는 구조가 반복됐다.
18세기 실학자들의 사회개혁안 가운데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이 토지 문제였다. 그들의 토지개혁안을 대개 ‘정전론(井田論)’ 혹은 ‘정전제’라고 부르는데, 18세기의 토지공개념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개헌안에 토지공개념이 포함돼 있다. 18세기와 21세기의 두 토지공개념은 같은가 다른가.
‘실학의 시조’ 반계 유형원이 제시한 토지개혁안은 ‘균전론’(均田論· 혹은 公田制)이었다. ‘실학의 중시조’ 성호 이익은 ‘한전론(限田論)’을 주장했다.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은 ‘여전론(閭田論)’과 ‘정전론’을 제시했다.
18세기 실학은 자본주의의 맹아, 즉 자유시장과 산업화의 싹을 틔운 사상인 것으로 간주돼왔다. 실학자들의 토지개혁안이 과연 그런 모습이었을까.
마을 단위로 땅을 나눠주는 정약용의 여전론은 ‘협동농장’을 연상시킨다. 30호(집)를 1개의 단위로 묶어서 1여(閭)라고 부르고, 이 1여가 땅을 공동소유, 공동경작, 공동분배하는 방식이다. 여전론은 정약용이 38세 때 내놓은 주장인데, 그의 말년 저작이자 국가개혁서인 『경세유표』(1817년)에서는 주로 정전론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정전론은 정약용의 독창적 발명품이 아니다. 민본주의 철학자 맹자에서부터 유래하는 동아시아의 이상적 토지제도였다.(『맹자』 ‘등문공’ 상 3장)
맹자가 제기한 정전제는 당대보다도 후대에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의 『맹자집주』에 의해 부각되었다. 주자학을 기반으로 조선을 창건한 사대부들이 제시한 토지개혁안도 정전론이었다.(이영호, ‘유교의 민본사상과 조선의 정전제 수용’, 『퇴계학논총』, 2009.)
18세기 실학자들이 반(反)주자학적이었다는 통설은 정전제를 놓고 보면 틀린 얘기다. 주자학자들이나 실학자들이나 토지 문제가 거론될 때면 단골로 내세우는 주장이 정전제였다.(이정철, ‘정약용의 전제개혁론의 역사적 맥락’, 『한국사학보』 제47호, 2012.)
실학뿐 아니라 주자학서도 단골 메뉴
실학자들이 제시한 사회개혁안을 당시 기득권 세력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안타깝게 우리가 근대화에 늦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 또한 근거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국왕과 신하들이 경제 문제를 놓고 토론할 때마다 숱하게 등장하는 것이 정전제 또는 균전제다.
중국에서 북위(北魏)와 당나라 때 ‘변형된’ 정전제인 균전제가 시행되었으나 중국에서도 이후 실시된 적은 전무했다. 정전론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토지를 나눈 후, 가운데 네모의 ‘공전(公田)’을 주변의 8명 ‘사전(私田)’ 경작자들이 공동으로 경작해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하는 형식이다. 정전론이 실시되지 못한 이유는 우물 정자 모양으로 모든 토지를 구획하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했지만 농지확장이 인구증가를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정전제는 토지국유제를 전제로 하기에 이미 토지사유가 관철된 상황에서라면 사유지를 국가가 수용하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전론의 정신을 살리면서 보다 현실적인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균전론과 한전론이었다. 우물 정자의 땅 모양에 상관없이 균등하게 토지를 나눠주려는 것이 균전론이고, 나눠준 토지의 매매를 제한하는 것이 한전론이었다.
세종·중종·영조 때 정전제나 한전제를 일부 지역에서 시범 실시해보았으나 실효성이 없어 폐기했다는 기록이 전한다.(『세종실록』 1419년 2월 20일, 『중종실록』, 1519년 7월 2일, 『영조실록』 1775년 1월 8일) 이같은 과정을 거쳐 정조는 한전론의 토지개혁을 포기하고 세금제도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기도 했다.(『정조실록』 1778년 6월 23일)
주자학자나 실학자나 왜 비현실적인 정전제 사고의 틀을 못 벗어난 것일까. 조선 후기에는 지주의 토지 독과점이 문제가 될 정도로 이미 토지 사유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만일 당시 실학이 자본주의 맹아 역할을 했다면 근대적 사유재산을 증식하는 정책이 제시됐을 것이다.
조선후기 토지 사유 확립돼 실현 못 해
18세기 실학자들이 살던 시대의 농사 풍속도. 단원 김홍도 그림 '밭갈이'. [중앙포토]
또 당시 이미 일반화된 지주-소작 관계의 폐해를 자본주의적 농업경영 방식으로 바꿔내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을 터인데 그런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주자학이나 실학의 비현실적인 이상론이 발상의 전환을 봉쇄한 것은 아닐까. 실현 불가능한 이상론을 반복하면 오히려 실현 가능한 현실적 대안이 봉쇄되기 마련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와 동시대를 산 유럽의 계몽주의자인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1776)에서 ‘누진세’(progressive tax system)를 주장한 것과 대비해 볼 수 있다. 누진세는 더 많은 토지소유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리는 세제다. 토지소유에 적용된 누진세제는 최적의 세금을 내고자 하는 지주가 자신의 경제적 타산에 따라 토지소유의 상한을 스스로 정하게 함으로써 ‘한전제’의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실학자들에게서 잘 보이지 않는다. “실학자들의 토지국유제에 기초한 정전론은 원시공산주의를 복고하자는 주장으로, 이미 토지사유가 거의 확립된 조선에서는 실현 가망이 없는 반근대적·유토피아적 이상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49~53쪽)
토지제도를 통해 볼 때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서양식 근대’를 의식하고 산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 나름대로 자기 시대의 문제를 풀려고 했을 것이고, 이제 그런 그들의 역사는 ‘근대의 안경’을 벗겨내고 좀 더 자유롭고 다양하게 재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가 오늘 풀어야 할 관심사항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 ‘근대’라는 딱지를 붙인 20세기의 이데올로기다. 20세기에 규정된 실학 개념에는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다. 토지 문제 관련 복고적 사고를 못 벗어난 ‘봉건적 사회주의’ 실학에 ‘근대=개혁=진보=당위=가야 할 길’ 등의 가치를 부여하며 미화한 것이다.
20세기 실학 개념 형성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최익한(1897~?)이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유학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1927년 조선공산당(일명 ML파 공산당)에서 조직부장·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1936년부터 조선학운동에 편승해 정약용과 실학을 널리 알리는데, 65회의 장기 신문 연재를 한 ‘여유당전서를 독(讀)함’이 대표적이다.
해방 후 월북한 그가 1955년 펴낸 『실학파와 정다산』은 당시 남북한을 통틀어 최초의 연구서였다. 문제는 그 방향이었다. 마르크스 이념, 즉 ‘사회주의 프레임’으로 재단한 실학이자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의 정치사상은 ‘혁명적 민주사상’으로, 여전제는 토지국유에 의한 민주주의적 토지분배를 지향했다고 해석되었고, 『조선통사』에 북한의 공식 견해로 수록됐다.(최익한 지음, 송찬섭 해설·엮음, 『실학파와 정다산』, 서해문집, 2011)
1969년 이후 북한에서 실학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 한계’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수정됐다. 마르크스주의보다 김일성 주체사상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사회주의 영향으로부터 남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북한처럼 노골적으로 ‘사회주의 프레임’을 우리 역사 해석에 적용하지는 않았지만, 남한에서도 은근히 실학자들의 토지개혁안을 ‘이상적 개혁사상’으로 묘사해놓곤 했다. 대부분의 역사서가 그렇다. “정약용의 토지개혁론은 여전론, 정전론의 순서로 저술되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여전론은 정전론을 넘어서는 이상적 개혁사상이었으며, 그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것”(김용섭, ‘조선후기 토지개혁론의 추이’, 『동방학지』, 1989)과 유사한 시각이 반영돼 있다. 해방 이후 친일파 미청산과 잇단 군사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이 확산되면서 ‘봉건적 사회주의’ 조차 묵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18세기 실학과 21세기 더불어민주당의 토지공개념이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박정희·노태우 군사정부 때 제기됐던 토지공개념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진영논리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헌법의 기본권 보호 정신과 배치된다. 현행 헌법 23조 1항에서 사유재산권을 인정하고 있으며, 2항에서는 ‘재산권의 권리 행사는 공공복리에 맞도록 해야 한다’며 공공복리를 위한 보완책을 마련해놓았다. 그리고 헌법 37조 2항에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 공공복리를 위하여 (법률로써)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특히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규정은 민주화운동의 성과로서 반영된 내용이다. 재산권뿐만 아니라 국민의 모든 기본권에 해당하는 것으로, 70년대에 긴급조치가 남용되었듯이 국가가 행정 편의를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도입된 것이다.
기본권 건드릴 ‘유사 국유제’ 의혹
그렇기 때문에 1990년대 초반에도 토지공개념 논란이 벌어졌을 때 결국 위헌 결정을 받은 바 있다. 이렇게 기본권을 건드릴 ‘유사(類似) 국유제’로 의심받는 토지공개념을 이번에 여당이 다시 들고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시대 주자학이나 실학에서 토지문제를 얘기할 때마다 비현실적인 정전론만 거론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 아닐까. 현실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의지보다는 실현성 여부와 상관없이 이상론을 제시하며 ‘정치적 인기’를 관리하는 수단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상론이 실현이 안 되면 그것에 반대한 상대 탓만 하면 된다. 20세기 실학 개념 형성 과정에 활용된 ‘사회주의 프레임’은 고질병을 부채질하고 있다. 18세기 실학의 실제 내용과 무관하게 우리 사회에 형성돼 있는 ‘묻지마 지지’의 분위기가 만들어낸 ‘복고적 착각’으로 보인다.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③ 시대 역행한 신분해방 반대론
공자는 '나면서부터 귀한 자는 없다"고 했다. 실학자들은 인간의 귀천을 구분했다. 공자 유학의 본령에 위배되고 근대 지향적 사고도 아니다.
민중을 개·돼지에 비유하는 망언으로 파면됐던 교육부의 한 고위 공무원이 최근 ‘파면 불복 소송’에서 이겨 복직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2016년 7월 언론인들과 저녁 자리에서 “민중은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고 했던 그의 발언은 여론의 공분을 샀다. 문제의 발언은 당시 700만 관객이 본 영화 ‘내부자들’의 한 대목을 인용한 것이었다고 한다. 영화와 현실을 혼동한 가운데 나온 ‘신분제 공고화’가 오늘 우리가 실학과 함께 생각해볼 주제다.
조선시대는 양반사회였다. 국가체제가 양반 중심으로 이뤄졌다. 조선 초기만 해도 문반과 무반 두 부류 관리를 지칭하던 양반이란 용어는 점차 지배층을 상징하는 말로 바뀌어갔다. 맨 위에는 양반층, 맨 아래는 노비층이 자리했다. 양반과 노비 사이에는 중인(하급 관료나 기술자)과 상민(농민·상공인)이 존재했다. 양반과 다른 세 계층의 신분 차별이 『경국대전』(1460년)에 법적으로 명문화되었고, 노비는 호적이나 재산목록에도 등록되었다. (김건태, ‘18세기 중엽 사노비의 사회·경제적 성격’)
영·정조 임금보다 더 시대에 뒤떨어져
18세기 실학자들은 신분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근대 지향’의 실학이라면 신분제 폐지를 주장했어야 할 텐데, 실학자들의 발언에서 인간의 차별 없는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선구적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분제 유지를 원칙으로 고수하면서 신분해방의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실학의 시조’ 반계 유형원은 신분의 귀하고 천한 차별이 불변의 이치이자 추세라고까지 말한다. “천지에 자연히 귀한 자가 있고 천한 자가 있어, 귀한 자는 남을 부리고, 천한 자는 남에 의해 부림을 당한다. 이것은 불변의 이치이고 역시 불변의 추세이기도 하다.” (『반계수록』 ‘奴隸’)
인간을 귀한 자와 천한 자로 나누어 보는 유형원의 인식은 “천하에 나면서부터 귀한 자는 없다(天下無生而貴者)”(『예기』)는 공자 유학의 본령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공자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백성은… 하대(下待)해서는 안 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民惟邦本)….”(『서경』) 동양 민본사상이 이 “민유방본”에서 나왔다. 이를 맹자는 “민귀군경(民貴君輕)”론으로 계승했다. “백성은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다음이고, 임금이 가장 가볍다.” (『맹자』 ‘盡心下’)
백성을 천하고 어리석게 보는 시각은 공맹을 따르는 유학자의 말이라고 보기 어려울뿐더러 근대 지향적이지도 않다. 유형원의 신분제 옹호는 ‘학교론’에도 적용된다. 그는 사대부의 모든 자제는 입학을 허용했지만, 서민의 자제는 준재(“凡民俊秀者”)의 입학만 허용하고, 일반 서민 이하의 자제는 배제했다.(『반계수록』 ‘貢擧事目’) 또 유형원은 임금노동자(雇工)가 확산되는 때를 기다려 노비제를 점진적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이미 노비제 폐지가 시대의 흐름으로 요청되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양반지주층을 안심시키며 노비제를 정당화하는 논변이었다.(김준석, 『조선후기 정치사상사 연구』, 157~163쪽)
‘실학의 중시조’ 성호 이익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도 유형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천하에 선자(善者)는 적고, 불선자(不善者)는 많다”(『곽우록』), “대개 백성에는 악인이 많고 선인이 적다”(『성호잡저』)는 발언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공맹의 성선설, 민본사상과 배치되는 발언이다. 이익은 이런 인간관을 바탕으로 하여 유형원이 그랬던 것처럼 신분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공맹보다는 관중이나 순자와 법가의 성악설에 기반을 둔 논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65~73쪽)
노비제 해체 늦추려 점진적 폐지 주장
실학에 대한 기존의 통설은 실학자들이 신분 차별을 유지하고 옹호했던 발언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유형원의 점진적 노비제 폐지와 이익이 노비세습을 나쁘다고 한 것만을 과장해서 높이 평가했다. 그들이 마치 당시로선 최선의 근대 지향의 제안을 한 것처럼 서술해놓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신분차별의 해소를 실질적으로 추진한 영조와 정조 임금에 비해서도 떨어지는 주장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당시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신분제 폐지의 흐름을 그들이 알면서도 은폐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송나라 때부터 신분 차별이 크게 완화되기 시작했다. 북송(960-1126) 시대 초기부터 과거 시험에 누구나 응시할 수 있게 했다. 신분보다 실력을 중시한 획기적 조치였다. 중국의 앞선 문물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요즘의 시진핑 정권이 보여주는 시대착오적 독재 행태와 착각해서는 안 된다. 15세기 명나라 때는 지배계층인 ‘신사(紳士)’의 각종 특권도 제한했다. 과거 급제자 본인 1세대에 한해서만 면세특권 등을 허용했고 세습을 금지했다. 신분 차별적인 주자학을 비판하며 왕수인(1472~1528)이 양명학을 주창한 것도 이 무렵이다. “길거리에 가득한 백성들이 모두 성인(聖人)이다”(『전습록』)는 양명학의 요지는 시대의 흐름을 대변하면서 공맹 유학의 본령이 무엇인지를 환기시켰다. (오금성, 『국법과 사회관행』 『모순의 공존』)
명나라 때는 또 과거에 합격한 신사만 노비를 소유할 수 있게 했다. 아무리 돈 많은 부자라고 해도 법적으로 노비를 소유할 수 없었다. 부자들은 양자와 양녀를 들여 노비처럼 부리기도 했지만 그들은 일종의 계약제로 언제든 신분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신분세습을 전제로 한 노비와는 달랐다. 청나라 강희-옹정-건륭제를 거치며 당시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별이 완화되었고 1750년대 들어서는 법적으로 노비 소유가 금지되었다. (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94쪽)
임진왜란 의병장 중봉 조헌(1544~1592)이 일찍이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북경을 다녀온 후 선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東還封事’·1574)에서 명나라의 신분제 실상을 알렸다. 조헌은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명나라를 본받을 것을 제안하면서, 조선에서도 공·사노비를 양민화해 징병자원을 증대시키면 20년 뒤 100만의 정예 병사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족문화추진회, 『연행록선집Ⅱ』)
유형원은 『반계수록』(1670년)에 조헌의 ‘동환봉사’를 세 번이나 인용했다.(‘勿限門地’, ‘奴隸’) 유형원 스스로 “중국에는 노비가 없고 모든 용역에 임금노동자(雇工)가 쓰인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이익도 이미 중국에는 신분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음과 같이 단언한 것으로 보인다. “노비가 세습되는 것은 또한 고금에 사해를 통틀어 있어본 적이 없다”(『성호사설』). 이들이 중국의 노비제 폐지 사실을 몰랐다면 시세의 흐름에 무척 어두웠다고 할 수 있겠고, 알고 있으면서도 조선의 노비제 폐지에는 눈을 감았다면 이들은 ‘시대의 선각자’가 아니라 시대의 진실 은폐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65~73쪽)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은 어떨까. 정약용은 1731년(영조7) 노비종모법을 실시한 이래 노비가 감소하자 이를 비판하며 오히려 그 이전의 악습인 일천즉천(부모 중 한 사람이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 방식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신해년(1731) 이후 출생한 모든 사노(私奴)의 양처(良妻·양인 신분의 처) 소생은 모두 어미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하니, 이때부터 위는 약해지고 아래가 강해져서 기강이 무너지고 민심이 흩어져 통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노비법을 복구하지 않으면 어지럽게 망하는 것(亂亡)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목민심서』 ‘辨等’)
18세기 실학, 체제 개혁보다 수호 지향
백성을 어리석고 천하게 보는 시각은 유형원·이익에 이어 정약용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실학자들이 흔히 주자학을 비판하며 공자의 본래 사상으로 돌아갔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들의 발언을 통해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정약용의 “나는 나라의 모든 백성이 통틀어 양반이 될까 걱정한다… 다 귀하면 성공하지 못하고 이롭지 못하다”는 주장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여유당전서』, ‘跋顧亭林生員論’). 이미 해체 중이던 신분제에 대한 정약용의 시각은 개혁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보수적이었던 것이다. (김영식, 『정약용의 문제들』, 29~40쪽)
오늘의 대한민국이 조선시대와 다른 가장 큰 차이는 신분제 폐지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법적으로 양인과 천민, 사농공상의 신분 차별이 없다. 현실적으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관행이 벌어지고, 금수저의 ‘갑질’이 횡행한다 하더라도 법 앞에서는 대통령이나 재벌이나 그 어떤 특권이 없이 모두 평등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부 공무원의 ‘신분제 재도입’ 망언은 이례적으로 돌출해 보인다. 혹시 그는 18세기 실학자의 저서나 실학자들을 신분해방론자로 엉뚱하게 영웅시해놓은 20세기의 역사책들을 너무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닐까.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④ 상업 발전 막은 ‘억말론’
1791년 정조 임금의 신해통공 조치로 군소 상인들의 '자유 상업'이 법적으로 허용됐다. 남대문 시장이 한국의 대표적 장터로 성장한 출발점도 그때 부터다. 그런데 대부분의 실학자는 자유 상업에 반대했다.
17~18세기의 실학자들은 주자학이 아니라 공자 본래의 유학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었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 했던 발언은 공자의 원래 취지에 위배되고 있음을 지난 기사(3회 신분해방 반대)에서 살펴본 바 있다. 이번에 생각해볼 주제인 상업에 대한 시각도 그렇다. 신분 차별론은 직업 차별론으로 이어졌다.
실학이 널리 알려진 이미지처럼 근대적 자본주의 경제를 지향했다면 적어도 상업을 장려하는 자세를 보여야 했을 것이다. 실제는 그 반대다. '근대적 시장경제'의 개념도 없었다. 북학파인 초정 박제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실학자는 상업을 ‘말업(末業)’으로 규정하고 ‘본업(本業)’인 농업과 비교해 열등하게 보면서 ‘억말론(상업 억제)’을 주장했다.
농업이 본업, 상업은 말업이라며 억압 주장
‘억말론’은 공자의 주장이 아니다. 공자의 상업에 대한 존중은 『논어』에서부터 확인된다.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의 제자 자공은 큰 상인이었다. 자공은 군주와 거의 대등한 영접을 받았고, 위나라의 재상까지 되었다. 상인이 비천하게 취급되었다면 재상이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공자 이전에 순임금은 어떤가. 순임금 자신이 상인과 공인 출신이었지만 황제가 되었다. “순임금은 기주 사람인데 역산에서 농사 짓고, 뇌택에서 고기 잡고, 하빈에서 옹기를 굽고, 수구에서 집기를 만들고, 부하에서 장사를 했다.”(『사기』)
‘억말론’은 상앙의 법가에서 유래했다. 법가는 상업발전이 국가의 근간인 농업을 동요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자극하므로 법으로서 이를 제한해야 한다는 ‘억상론(抑商論)’을 주장했다. 진·한 시대를 거치며 법가의 주장은 ‘중농억상(重農抑商)’이라는 국가 산업정책의 골간으로 발전했다. 상업을 천시하고 부정적으로 여기는 정책은 사·농·공·상이라는 사민론(四民論)의 근거가 되었다.(이화승, ‘상업’, 『명청시대 사회경제사』)
공자는 상업을 억제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말업’이라고 부른 적도 없다. 공맹의 유교 경전들은 상업을 농업보다 오히려 더 앞세우기도 했다. 주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기록한 『주례(周禮)』만해도 상업을 농업 앞에 서술했다. 『주례』에는 “무릇 백성이 자본(貨財)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경우는 국법으로 명령해 행해지고 영을 어기는 것은 형벌을 가한다”는 규정까지 나온다. 공자와 그 제자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일종의 ‘상인 길드’까지 존재했음을 추정해볼 수 있게 한다. 상인들이 길드로 조직되어 통치자와 규약을 맺을 정도로 당시 상인 권력이 컸으며 상업의 자유가 보장되었다는 얘기다.(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춘추좌씨전』이나 『춘추곡량전』에서도 상인을 농민과 공인의 앞에 서술하곤 한다. 농업을 낮게 봤다는 얘기는 아니다. 농업·공업·상업에는 직업의 구분이 있을 뿐 귀천의 차별이 없었다는 얘기다. 명나라 말기 양명학자 황종희가 『명이대방록』에서 “공업과 상업이 모두 본업”이라고 했듯이, 농업이나 상업을 모두 본업으로 보는 것이 공자 유학의 본령이라 할 수 있겠다.
18세기 중엽부터 자유 시장 ‘난전’ 확대
조선의 실학자들 가운데 박제가는 예외적으로 적극적인 상업진흥론을 제시했다. 그는 『북학의』에서 인구의 10분의 3을 상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놨다. 박제가를 제외하고 다른 실학자들에게서 이런 주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북학파의 영수’ 연암 박지원이 ‘허생전’에서 보여준 말총이나 과일의 매점매석을 통한 폭리 취득을 상업에 대한 긍정적 의미로 볼 순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전근대적 ‘악덕 상업’을 예로 들어 상업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조했다고 볼 수 있겠다. 허생 스스로 “백성을 해치는 방법… 나라를 병들게 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재물로 얼굴을 깨끗하게 꾸미는 것은 그대(상인) 무리의 일일 뿐이지, 만 금이 도(道)를 어찌 살찌운단 말인가?”라는 허생의 발언에는 상업을 천하게 여기는 시각이 깔려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또 다른 북학파인 담헌 홍대용은 백성들의 이사와 여행의 자유를 제한할 정도로 국가의 엄격한 통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상업과는 거리가 있었다.(강명관,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
유형원·이익·정약용 등 다른 정통 실학자들은 어땠을까. 그들 역시 ‘말업’이란 용어를 계속 사용하며 ‘농업=본업, 상업=말업’의 ‘무본억말’ 주장을 되풀이했다.
‘실학의 시조’ 반계 유형원은 화폐유통의 필요성을 제기했으나 기본적으로 ‘억말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상품화폐 경제가 발전하는데 필수적인 시장에 대한 인식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지방의 정기시장인 장터를 벽촌의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리 지어 술 마시고 절제를 못 하게 하며 풍속을 헤치면서 도적을 양성한다"(『반계수록』)는 것이 이유였다. 이러한 시장폐지론은 조선 전기 이래 성리학자들에게 뿌리 깊게 이어져 온 ‘무본억말’의 편견이었다.(김준석, 『조선후기 정치사상사 연구』)
유형원의 시장폐지론은 ‘실학의 중시조’ 성호 이익에게 계승된다. 이익은 화폐와 시장을 철폐해야 한다는 ‘폐전론(廢錢論)’과 함께 ‘억말론’을 일관되게 표방했다. "농사에 힘쓰게 하는 것은 억말(抑末·상업 억제)에 있다.… 돈이 통용되면서부터 백성은 일체의 이익을 좋아해서 혹 많은 이들이 쟁기를 버리고 시장에서 노니 농사가 그 폐단을 받고 있다."(『성호사설』)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도 ‘무본억말’의 유형원·이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가 정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을 보면 이렇다. "지금 농업을 올리고 싶으시면, 말업을 억압하십시오. 그러면 농업이 스스로 높아집니다.… 지금은 말업(상업)이 본업(농업)을 짓밟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應旨論農政疏’)
몰락한 농민층과 도망간 노비들이 농사를 떠나 상공업에 뛰어들어 생계를 도모하는 것은 18세기 조선 사회의 주요한 변화 흐름이었다. 도망 노비에게 생계 기반을 제공하는 상공업과 토지의 사유화가 확대되기 시작했다. 1770년 간행된 『동국문헌비고』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5일장 같은 시장(場市)은 각 도마다 평균 120여 개소씩, 도합 1064개소가 있었다. 개성의 송상, 의주의 만상(청나라 무역상), 서울의 경강상인 등 거상들이 나타났다. 많은 물자가 유통되는 정기시장인 장시도 규모가 큰 도시들에 속속 생겨났다. "상업이 농업을 능가한 지가 오래되었다"는 정약용의 발언은 그런 상황을 서술한 것이다. 상업과 화폐 경제의 발달 추세를 알고 있었음에도 정약용은 복고적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을 귀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는 실학자들의 ‘억말론’ 주장과는 반대의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화폐가 발행되고 상업이 일정 정도 발전하면서 시장이 곳곳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신분해방의 추세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다. 1791년 정조 임금은 좌의정 채제공의 보좌에 힘입어 ‘난전(亂廛) 금지’ 정책을 폐지했다. 대상인(시전 상인)들의 유통 독점 특권을 없앤 것이다. 신해년에 내려진 조치라 ‘신해 통공(通共)’이라 부르는데, 일종의 상업자유화 정책이었다. 도성 안에서 육의전 품목을 제외한 모든 품목에 대해 자유매매를 허용했다. 이제 정부의 허가 없이도 다양한 상업 행위(난전)가 가능해졌다. 자유 상인(私商)을 중심으로 한 상품유통 체제는 서울에서 전국으로 확산돼 나갔다.(고동환, 『조선시대 서울도시사』)
공자는 상업 존중…실학, 유학 본령에 어긋나
18세기 중엽부터 통공을 요구하는 군소 상인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대부분의 실학자는 그런 흐름과는 반대되는 소리를 냈다. 성호 이익과 동시대 실학자인 유수원은 서울에서만 시행되던 ‘난전 금지’를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정부에 요청하면서 군소 상공인의 시장 자유화를 비판했다. 유수원은 "대저 작은 것은 큰 것에 통합되고,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 예속되는 것이 사리상 떳떳한 일"(『우서』)이라며 특권 대상공인 위주의 ‘관치(官治) 상공업’을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정조의 신해통공 정책은 군소 상공인들의 자유상업을 법적으로 허용한 것이었다. 이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1776)에서 처음 체계화된 전면적 자유교역론과 비교되기도 한다. 정조의 신해통공이 시장의 자유를 향한 세계적 흐름에서 그리 뒤떨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다.(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상업과 농업을 동등하게 중시한 공자에게 시장은 삶의 기본원리로 제시되었다. "해가 중천에 뜨면 시장을 열어 천하의 백성을 초치하고 천하의 재물을 모으며, 교역하고 물러나 각기 원하는 적합한 것을 얻는다."(『역경』 ‘계사전’) "이달(추석이 있는 달)에는 관문과 시장을 드나드는 것을 쉽게 하고, 상단들을 오게 하여 재화와 물건을 시장에 납품하게 하고, 이를 통해 백성을 편하게 한다."(『예기』) 이런 점을 고려하면 실학자들의 ‘억말론’은 유학의 본령과도 어긋나고 근대 지향적이지도 않았다.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⑤ 북학의 반민족성
북학파는 우리말 대신 중국어를 쓰자는 주장까지 했다. 북학파의 주장이 실현되었다면 세종대왕 동상이 광화문에 자리 잡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 북경에 다녀온 사람들이 남긴 기행문을 연행록이라 부른다. 북경의 옛 이름인 ‘연경’의 ‘연’자를 따왔다. 담헌 홍대용의 『담헌연기』, 초정 박제가의 『북학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이 대표적이다. 이 세 사람은 북학파라 부르기도 한다. 북쪽 청나라를 배우자는 주장을 해서 그렇게 불렀다. 북학도 실학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북학은 북벌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북벌은 청을 정벌하자는 뜻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복수하려는 의미가 담겼다. 북벌은 효종과 송시열을 필두로 한 17세기 조선 권력층의 이데올로기였다. 『북학의』와 『열하일기』는 북벌을 비판한다.
‘북벌 대 북학’ 이분법 … 북학만 과한 칭송
북벌은 시대착오적인 반면 북학은 모두 진리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20세기 한국학 연구자들은 18세기의 실학과 북학에 과도하게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성리학과 실학을 대립시켜 보는 이분법의 오류는 북벌과 북학에서도 반복된다. 북학에 대해 거의 찬양 일색이다.
강희-옹정-건륭제로 이어지는 17~18세기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대 영토를 개척했다. 명의 세 배에 달할 정도로 강대한 제국이었다. 홍대용(1765~1766)·박제가(1778)·박지원(1780)의 연행은 청 전성기의 후반이었다. 국방력이 허약한 조선의 청 정벌은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북벌은 청을 겨냥했다기보다는 국내용이었다.(계승범, ‘조선의 18세기와 탈중화 문제’, 『정조와 18세기』)
북벌의 이론적 기반은 주자학의 화이론(華夷論)이다. 본래는 문명의 중심(중화)과 변방(오랑캐)을 문화적으로 구분하는 이론인데, 주희는 이를 종족과 지리를 중심으로 차별하며 변질시켰다. 주자학에 의하면, 이적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과 금수의 중간에 속하는 존재였다.(『주자어류』) 조선의 정통 주자학자들은 이 차별적 화이론을 명·청 교체기에 적용했다. 조선에 은혜를 베푼 중원 한족의 명은 중화로, 조선에 치욕을 안긴 만주 여진족의 청은 오랑캐로 여겼다.
북학이 북벌을 비판했으므로 마치 화이론을 극복하고 탈(脫)중화로 나아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북학에서 근대적 민족의식의 맹아를 찾는 연구를 하기도 했다. 한국 근대화의 연원을 실학에서부터 찾으려는 20세기 한국학자들의 시도는 곳곳에서 무리한 해석을 낳으며, 근대화의 진정한 사상 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게 했다.
북학파가 청의 발달한 기술과 상공업 진흥을 배우자고 한 것까지 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박지원이 말했듯이 우리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오랑캐에게라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 문화를 지나치게 비하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닐까. 영·정조 시기를 ‘진경시대’라며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있듯이 조선의 18세기가 사회 경제적으로 그렇게 힘들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실학자의 표현을 보면 18세기 조선은 마치 문명 이전의 상태에 사는 것처럼 여겨진다.
박지원은 이렇게 말한다. “청나라의 장관(壯觀)은 깨진 기왓조각에도 있었고 냄새 나는 똥거름에도 있었다.”(『열하일기』) 북학을 강조하기 위해 깨진 기왓조각이나 똥거름까지 아름답다는 극단적 표현을 썼다고 이해한다고 해도, 우리의 한복과 상투까지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문학 형식을 빌려 우리 풍속을 희화한다. “입는 옷이란 모두 흰 옷이니 이는 상주들이 입는 옷이고, 머리는 송곳처럼 뾰족하게 묶었으니 이는 남쪽 오랑캐의 방망이 상투이거늘, 이게 무슨 예법이란 말인가.”(『열하일기』)
1789년 연행을 다녀온 단원 김홍도가 1790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북경 유리창'. 유리창의 번화한 거리와 서점들은 조선 연행사들의 단골 탐방 코스였다. [사진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북학파가 중국어를 ‘국어’로 채택하자는 주장까지 했음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홍대용은 말년 저작인 『의산문답』에서 주자학의 화이론을 극복했다고 평가받기도 하는데 그런 홍대용조차 우리말을 “오랑캐 풍습”(夷風)이라며 부끄러워했다. 그는 연행에서 만난 청나라 유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는 중국을 사모하고 존숭하며 의관문물이 중화를 방불케 하여 예부터 중국에서 ‘소중화’라고 부르지만 언어만은 아직도 이풍(夷風)을 면치 못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담헌서』)
박제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중국어는 문자의 근본이다.… 온 나라 사람이 본래 사용하는 말을 버린다고 해도 안 될 이치가 없다.… 그런 연후에야 ‘이(夷·오랑캐)’라는 한 글자를 면할 수 있고 수천 리 동국(東國·조선)에 저절로 주·한·당·송의 기풍이 나타날 것이다. 이 어찌 크게 상쾌한 일이 아닌가.”(『북학의』)
서양 각국에서 근대적 민족의식을 진작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언어 민족주의’였다. 마르틴 루터가 기독교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써서 많은 사람이 읽게 한 것은 독일과 프랑스가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의 핵심 이벤트였다. 자기 민족의 언어를 찾아가며 근대국가를 형성한 서양 각국과 비교하면, 북학파의 우리말 폐기 주장은 민족국가 건설의 흐름과 배치되는 것이었다.(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외국의 앞선 제도와 문물을 배우자는 얘기가 조선 후기 북학파에서 처음 나온 것도 아니었다. 18세기 중반의 유학자 농암 유수원(1694∼1755)은 “중국은 표의문자를 쓰지만 우리나라는 표음문자여서 구태여 똑같이 할 필요가 없다”(『우서』)고 했다. 유수원은 중국의 발달한 제도와 도구를 배우자고 하면서도 언어·의복·음식 같은 고유의 풍속은 별개의 일로 보았는데, 이 같은 자주적 문화 의식은 15세기 유학자 눌재 양성지(1415∼1482)에서도 확인된다. 세조가 “나의 제갈공명”이라고 격찬했고, 정조는 그의 문집인 『눌재집』을 간행했을 정도로 중시한 양성지는 지역과 풍토가 다른 중국과 조선의 언어·의관·풍속은 다를 수밖에 없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의관과 언어가 중국과 다르지 않다면, 민심이 정착되지 않아서 제나라가 노나라를 따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의관은 조복(朝服) 이외에 중국 복제를 다 따를 것이 없고, 언어는 통역관 이외에 반드시 전통 풍속을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세조실록』) 언어와 복식까지 중국과 같아진다면 제나라가 노나라가 되는 것과 다름없다는 비유를 들면서 국가 존망의 문제로 여기고 있는 대목이 주목된다.(배우성, 『조선과 중화』. 한영우, 『조선 수성기 제갈량 양성지』)
임진왜란 의병장 중봉 조헌(1544~1592)이 16세기에 북경을 다녀온 후 쓴 상소문(‘동환봉사’·1574년)도 빼놓을 수 없다. 박지원과 박제가는 조헌을 본받으려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신분제 해소의 문제는 거론 안 했다. 조헌은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명나라 제도를 본받자고 제안하며, 조선에서도 공·사노비를 양민화해 징병자원을 증대시키자고 주장한 바 있다.(민족문화추진회, 『연행록선집Ⅱ』)
박지원과 박제가는 조선이 배워야 할 청나라의 앞선 문물로 수레와 선박을 강조했다. 18세기 서구에선 영국의 증기기관 발명을 필두로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미국은 1776년 독립혁명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해방되었고,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을 맞고 있었다. 명·청에서 많은 제도와 문물을 배워간 서구가 이제 청나라를 따돌리고 근대적 산업국가로 도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학파에 왜 그런 서구의 변화와 발전을 몰랐느냐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질문은 실학과 북학을 과도하게 띄어 놓은 20세기의 한국학자들에게로 돌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친청 북학파’와 ‘친일 개화파’ 멀지 않은 거리
18세기에 ‘민족’ 개념이 있었는가에 대해선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다. 당시 사회적 규합 개념을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북학파가 우리의 ‘공동체 문화’ 혹은 ‘민족 문화’를 비하한 점은 20세기 연구자들이 짚었어야 했다. 근대 민족국가 형성의 연원을 규명하기 위해 북학이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기존의 통설에서 그 같은 비판적 시각은 보이지 않는다.
북학파의 ‘민족 문화’ 비하는 당대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로 이어졌다.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며 그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 친일 개화파였다. 친청 북학파와 친일 개화파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청의 자리에 일본을 바꿔 넣으면 되는 것이었다. 매국으로까지 치닫는 친일 개화파의 반민족적 논리는 친청 북학파의 반민족적 사대주의에서 준비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북벌론은 많은 한계가 있었음에도 역설적으로 청에 독립적인 자세를 취하게 했다. 이 같은 독립적 자세를 ‘조선중화론’이라 부른다. 명나라가 망한 이후 한시적이긴 했지만 ‘조선도 중화’라는 자부심을 심어놓았다. 그 씨앗은 19세기를 거치며 전국의 수많은 일반 유생들 마음속으로 스며들어가 북벌과 북학의 한계를 뛰어넘어 대한제국의 창건이념으로 발전했다. ‘칭제요청 상소’를 쓴 일반 유생들은 저명한 주자학자가 아니었고 실학자나 북학파도 아니었다. 20세기 한국학자들이 소홀히 해온 그 일반 유생들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좀 더 살펴볼 예정이다.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⑥ ‘민국’ 외면했는데 근대적인가
'민국'이란 말은 영·정조 때 이미 널리 쓰였다. 대한제국 시기 신문·잡지를 통해 일상화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계승된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도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사진은 광화문 촛불 집회. [중앙포토]
대한민국의 ‘민국(民國)’이란 단어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대개 20세기 들어 서양의 민주주의가 전해지며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1911년 탄생한 ‘중화민국’에서 빌려왔다고 강변하는 이들도 있다. ‘민국’이 18세기 조선의 영조·정조 시대에 이미 널리 사용된 용어였음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1996년 무렵 이러한 사실을 처음 발견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 유교정치 사상의 핵심으로 민본(民本)만 알던 상황이었는데, 영조와 정조가 민국이란 말을 자주 쓰고 있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을 때 놀라움을 넘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이태진,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
어쩌다 한번 ‘민국’을 쓴 것이 아니었다. 영조 즉위년(1724)부터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조대 31건, 정조대 43건, 순조대 59건 등이 발견된다. 영조대를 경계로 일종의 시대정신이 변화하고 있다고 추정해볼 수 있겠다. 일반 백성의 존재가 특별히 부각되기 시작했다. 영조는 탕평 정치의 궁극적 목적이 ‘민국’에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김백철, ‘영조대 민국 논의와 변화된 왕정상’)
‘君國’에서 ‘민국’으로의 발전 경로 추적해야
조선은 왕과 사대부 중심의 나라였다. ‘백성’과 ‘나라’를 나란히 병렬 표기한 ‘민국’의 의미가 작아 보이지 않는 이유다. ‘민국’의 의미가 ‘백성과 나라’에서 ‘백성의 나라’, 즉 ‘국민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이 탈신분적 근대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의 범위는 양인 이하 서얼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피지배계층 전반으로 확장된다. 우리 민족 내부에서 근대지향의 요소를 찾으려고 한다면 ‘군국(君國)’에서 ‘민국’으로의 발전 경로를 추적해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관심의 확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 근대지향의 온갖 긍정적 요소를 실학이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다.
근대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우리 민족의 지상목표가 근대화였는데, 그 근대화를 뒷받침한 진정한 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영조 때 쓰인 용례에는 “민국지대정(民國之大政)” “민국지대사(民國之大事)” “민국지대계(民國之大計)” 등이 포함된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표현할 때 ‘민’과 ‘국’이 하나의 묶음으로 마치 국가 자체를 대신하는 말처럼 사용되고 있다. 흉년이 들었을 때 “민국이 병들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병역이나 부역의 개혁을 논의할 땐 “대변통이 있은 후에야 민국이 보전된다”고 했다. 영조는 백성을 자신과 같은 피를 나눈 ‘동포’로서 인지하면서 “백성을 위해서 임금이 있는 것이지 군주를 위해서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는 말까지 했다. 실행이 따르지 않는 수사적 표현이라고 해도 그 수준이 오늘에 비추어 보아도 상당하다.
‘민국’ 용어는 정조를 거쳐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어진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민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민국사(民國事)를 크게 소홀히 했으니…” “민국사는 감히 한가히 놓을 수가 없다”에서처럼 ‘민국사’라는 말도 상용했다. ‘민국’ 또는 ‘민국사’는 대개 소민(小民)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나라와 백성의 상호 의존 관계를 중시하면서 사대부 신하보다 백성을 더 앞세우는 현상을 영·정조 시대에 공통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이태진, ‘조선시대 민본의식의 변천과 18세기 민국 이념의 대두’)
‘민국’ 용어에 조응하는 정책도 주목할 만하다. 일반 양민의 군역 부담을 절반으로 줄인 ‘균역법’ 실시, 극악한 형벌 폐지(『속대전』 간행), 백성의 소리를 왕이 직접 경청하는 신문고·격쟁 부활 등 영조의 개혁 정책은 ‘민국’ 용어 확산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조 때 이뤄진 소민들의 상업자유화 정책인 ‘신해통공’, 서얼 등용, 공노비 폐지 논의 등도 마찬가지다.
18세기 실학자들은 ‘민국’이란 용어를 어떻게 사용했을까. 20세기 한국학계의 통설로 자리 잡은 실학의 근대성 혹은 진보성이 타당한 평가라면, 실학자들은 당시 유행한 ‘민국’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확장했어야 후대의 높은 평가에 어울릴 법하다.
정조와 동시대를 살았던 다산 정약용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보면 ‘백성의 나라’를 지향하는 ‘민국’의 흐름과는 오히려 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수령으로서 애민(愛民)한다는 이들이 편파적으로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 것을 위주로 삼아서, 귀족을 예(禮)로 대하지 않고 오로지 소민을 두둔하고 보호하는 경우 원망이 비등할 뿐만 아니라 풍속까지 퇴폐해지니 크게 불가하다. … 국가가 의지하는 바는 사족(士族)인데, 그 사족이 권세를 잃은 것이 이와 같다. 혹시 국가에 급한 일이 생겨 소민들이 무리지어 난을 일으킨다면 누가 능히 막을 것인가.”(『목민심서』 ‘변등’)
‘소민’은 사대부의 대민(大民)이나 준양반층을 제외한 상민·노비·천민 등을 지칭한다. 왕의 입장에서 보면 소민이나 대민이 다 ‘백성’일 수 있다. 영·정조는 소민의 지위를 높여 대민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해나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정약용의 위와 같은 발언은 ‘민국’ 표현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당시 여전히 온존했던 신분 차별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의 건국 이념의 하나는 ‘민본(民本)’이었다. 고려 말부터 급격히 논의되었던 『서경』의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民惟邦本)”가 민본 사상의 출처다. ‘민국’의 뿌리는 이 ‘민유방본’으로 연결된다. ‘민유방본’을 줄인 ‘민방’의 또 다른 압축 표현이 ‘민국’이었다. ‘방’과 ‘국’은 같은 뜻이다. ‘민유방본’ 혹은 ‘민위국본(民爲國本)’ 같은 표현이 『조선왕조실록』에 658회, 『승정원일기』에 446회 등장한다. 이 중 세종 때 21회, 중종 때 29회, 명종 17회, 선조 14회 사용되던 ‘민유방본’의 빈도수는 숙종 37회에 이어 영조 때 무려 124회로 급증한다. 정조 34회, 순조 118회, 고종 98회였다. ‘민국’이란 말이 영조 때부터 급증하는 것과 일치한다.
‘민국’ 용어와 소민 보호는 ‘예방혁명’일수도
영·정조 시대에 ‘민유방본’ ‘민국’이 급증한 이유가 무엇일까. 군주의 백성에 대한 시혜의 감정이 이때부터 갑자기 증가했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16세기 말 정여립의 대동계 사건 이후 각종 민란에 등장한 “민유방본” 사상은 그 의미가 달라졌던 것 같다. 특히 영조·정조 때 『정감록』을 내세운 변란이나 역모 사건이 발생하며 “민유방본”과 함께 이씨왕조교체설 또는 정씨왕조도래설을 유포했다. 『정감록』의 신분타파 사상과 새 왕조의 예언은 서당 보급, 인쇄술 발전, 종이 생산·서적 유통량 증가 등에 힘입어 확산됐다. 사대부 양반들이 과거시험용으로 암송하던 “민유방본”이 공맹 유학의 상식적 레토릭에 그쳤다면, 민란에서 활용된 “민유방본”은 혁명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왕조 자체를 위협하는 ‘혁명적 이상주의’가 “민유방본” 속에는 본래 내포돼 있었다. 그런 점에서 탕평 군주들의 ‘민국’ 용어 사용과 ‘소민 보호’ 정책은 아래로부터의 민압(民壓)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예방혁명’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순조 때 기록엔 ‘민국’의 ‘실(實)’을 거론하는 대목도 나온다. ‘민국’이라는 말이 실제 사실과 부합되는지 여부를 논의하고 있는데, 이때 ‘민국’이 ‘백성과 나라’를 뜻한다면 어색하다. ‘나라’에 ‘실’이 없다는 말은 가능해도, ‘백성’이 ‘실’이 없다는 말은 성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경우 ‘백성의 나라’로 풀어야 자연스러워 보인다.
고종 시대에는 ‘민국’ 용어가 다시 급증하면서 대중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동학 집회와 독립협회의 관민공동결의문에도 사용되었고, ‘독립신문’ ‘매일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일간지,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대동학회월보’ 같은 잡지, 황현의 『매천야록』, 김윤식의 『음청사』, 정교의 『대한계년사』 등 각종 서책에 두루 쓰이며 일상화되었다. 그 의미도 ‘백성과 나라’를 넘어 ‘백성의 나라’로 확장되었다. 독립협회기관지 ‘대조선독립협회회보’(1896)는 서울주재 각국 외교관을 소개하며 “불란서 민국”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다른 나라는 ‘제국’ ‘왕국’ ‘합중국’이라고 하면서, 유독 프랑스만 ‘민국’이라고 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 신분·인종 차별이 폐지된 사실을 반영한 표기로 보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대한제국기에는 ‘대한’과 ‘민국’이 어우러져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자연발생적으로 불려지고 그렇게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설립할 때도 이 같은 흐름이 반영되었다. 상해임정이 “대한제국 계승”의 의지를 밝히면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한 배경에는 18세기 이래 면면히 이어온 ‘민국’ 이념의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성공적으로 빠르게 진행되어온 것도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⑦ ‘왕정 vs 공화정’ 이분법의 오류
'근대 혁명' 시기였던 18~19세기 대부분 유럽 국가의 정치 형태는 '군주정'이었다. 오늘날까지 서유럽 선진국과 영연방국은 왕을 국가의 중심으로 섬기고 있지만 그 나라들을 '근대 국가'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름만 '공화국'인 나라보다 훨씬 더 근대적 '국민국가'이고 민주적이기 때문이다. '왕정 극복'을 한국 근대화의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제시해온 관행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근대사를 설명할 때 흔히 드는 기준이 ‘군주정(왕정) 극복’이다. 왕이 없어야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왕이 군림하는 군주정은 전(前)근대의 봉건시대로 간단히 치부되곤 한다. 왕의 목을 쳐낸 경험이 없는 우리 역사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콤플렉스를 느끼기까지 한다. 공화정이야말로 절대 선이며 근대국가의 상징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과연 왕정 극복 혹은 폐지가 근대화의 필수 조건일까.
유럽의 18세기를 ‘근대 혁명’의 시기로 대개 평가하는데, 19세기까지 대부분의 유럽 국가의 정치 형태는 ‘군주정’이었다. 18~19세기에만 그런 것도 아니다. 오늘날의 영국·스페인·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등 서유럽의 잘사는 이른바 선진국들, 그리고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 영연방국가들은 모두 왕을 국가 권위의 중심으로 섬기고 있다. 이 나라들은 대개 근대민족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왕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부각시켰다. 왕의 대가 끊기거나 식민지상태로부터 독립하여 왕이 없을 경우에는 이웃 나라에서 빌려와 군왕제를 복원시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군주국들을 ‘근대국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왕이 군림하고 있는 나라지만, 오히려 이름만 ‘공화국’인 나라보다 훨씬 더 ‘국민국가’이고 민주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또 공화국이라고 하면 ‘민주공화국’만 있는 줄로 아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대개 왕이 없는 체제를 공화정이라고 정의하는데, 공화정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가장 오래된 공화정은 ‘로마공화정’인데 ‘귀족공화국’이었다. 중세 이탈리아의 수십 개 도시에 ‘귀족공화국’이 존재했었다. 네덜란드는 200여년간 ‘귀족공화정’(1581~1795) 시대를 경험하고 나서 왕정을 채택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화국이 무조건 근대국가라고 한다면. 노예제 국가였던 로마공화국도 근대국가로 봐야 할 텐데 그렇게 보는 경우는 없다. 이탈리아나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 크롬웰의 귀족공화국(1649~1659)도 마찬가지다. 구(舊)소련이나 중국·베트남·북한·쿠바의 경우는 ‘계급공화정’ 혹은 ‘인민공화국’으로 분류된다. 이 인민공화국들은 언필칭 ‘공화국’이라고 해도 모두 다 ‘민주국가’가 아니라 계급독재 국가들이다. 공화국이 곧 민주국가라는 등식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민주주의와 공화제가 결합한 ‘민주공화국’은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제대로 구현된 곳을 찾기 힘든데, 그 까다로운 기준을 한국의 조선시대에만 적용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이영재, 『근대와 民』)
군주정·공화정 정체와 민국 개념 혼동 말아야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민국’이란 용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음을 이 ‘실학별곡’ 시리즈의 6회 기사에서 살펴보았다. 탕평군주 시기 ‘민국’ 이념의 대두는 우리 민족의 근대화 과정을 논의할 때 무시되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왕정과 공화정을 선악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고정관념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다. ‘군국(君國)’에서 ‘민국(民國)’으로의 변화 양상이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서 많이 발견되는데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다. 잘못된 전제에 의한 고정관념은 새로운 사고를 막는다.
영·정조 시대의 ‘민국’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곧바로 이를 ‘국민주권국가’와 동일시하는 것도 문제다. ‘민국 담론’은 영·정조 시대의 백성에게 나라의 주권이 있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의 주권은 왕에게 있었지만, 영조 시대를 기점으로 민국이란 표현이 급증하는 이유를 규명해보자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헷갈려 하는 독자들이 더러 있어서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민국 담론’을 체계화한 황태연 동국대 교수에 의하면, 근대 정치학의 기본 개념에 대한 혼동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민국은 신분 차별의 여부와 관련된 용어로, 임금의 나라 혹은 귀족의 나라가 아니라 백성의 나라라는 의미일 뿐이다. 즉, 귀족 같은 특권 신분이 해체되어 모두가 백성이 된 경우를 가리킨다. 민국이 주권의 소재를 나타내는 국민주권국가를 뜻하지는 않는 것이다. 나라의 주권이 어디에 있느냐를 기준으로 하는 정부형태(군주정·귀족정·공화정·민주정 등)와 민국 개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민국은 군주정·귀족정·공화정·민주정 등 그 어떤 정체와도 결합될 수 있다. 군주정이면서 민국일 수 있고, 공화정이면서 민국일 수 있다는 얘기다. 영국·네덜란드·스웨덴·일본 같은 ‘입헌군주정’도 ‘백성의 나라’로서의 민국을 기반으로 하고, 미국·프랑스·대한민국 같은 ‘민주공화국’도 민국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 이후의 프러시아, 요셉 2세 이후의 오스트리아, 에카테리나 여제 이후의 러시아 같은 ‘계몽군주정’도 마찬가지인데, 조선의 영·정조는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학 용어로 군주정이나 공화정은 ‘정체(政體)’에 속하는 반면, 민국은 ‘국체’에 속한다. 국체와 정체를 혼동하는 우리 사회의 ‘오래된 착각’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본다.(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근대지향의 어떤 이념을 실학이라고 부를 경우, 민국을 추구한 영·정조는 실학에 해당하는 새로운 관점에서 재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왕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계사의 실상과 다른 이중 잣대를 우리 역사에만 적용하는 것이다. 18세기의 소위 실학자로 불리는 이들은 오히려 양반 사족 중심의 신분제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근대 지향의 진보적 발언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고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한국 근대화의 진정한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영·정조가 근대화를 모두 추동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래로부터 백성들의 압력도 동시에 살펴봐야 할 것이다. 18세기의 실학자들에게 주로 맞춰진 근대화의 초점을 다양한 차원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한국사를 새롭게 보려는 시도들이 비록 조금씩이나마 늘고 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1996년에 조선왕조실록의 민국 용어를 처음 발굴한 데 이어,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2004년 『다시 찾는 우리역사』의 전면개정판에 통사로서는 최초로 민국 개념을 적용하며 ‘백성의 나라’로 해석했다. 2011년엔 김백철 계명대 교수가 이태진 교수와 함께 『조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을 펴내며 민국 관련 연구를 정리했다.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등은 우리나라 국호를 설명하며 민국 개념을 적용했다. 황태연 동국대 교수는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와 민국의 의미』(2016),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2017),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2018) 등을 연달아 펴내며 민국이 ‘백성의 나라’임을 사료를 통해 실증하고 이를 한국 근대화의 주요 사상으로 정립해냈다. 최근에는 이영재 박사(한양대 학술연구교수)가 『근대와 民』을 펴내며 ‘민국 담론’에 가세했다.
실용 지나친 강조, 일제 총독부 입맛에 부합
조선과 대한제국이 일제 침략으로 패망하면서 우리의 역사조차 일제의 입맛에 맞게 재단되었다는 점에서부터 문제의 근원을 찾아야 할 듯하다. 우리 역사에 대한 근대적 서술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1890년대부터 시작했다. 망국의 지식인들 가운데에는 나라가 망한 원인으로 조선 정부의 책임을 물으면서 그나마 재야의 지식인들은 나름대로 근대국가를 꿈꾸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재야 지식인의 사례로 선택된 것이 소위 실학이었다. 1910년대 최남선의 주도로 ‘조선광문회’가 펼친 고서적 간행사업은 1930년대 ‘조선학 운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다산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맞아 위당 정인보 등이 추진한 『여유당전서』 간행은 실학을 새로운 학문의 영역으로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 해방 이후 식민사관 극복과 조국 근대화 정책과 맞물리며 실학은 20세기 최고의 지위를 차지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형성된 ‘실학의 신화’ 가운데 하나는 조선 정부의 무능으로 훌륭한 실학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영조는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경연에서 강하였고, 정조는 화성 신도시 건설에 정약용의 제안을 활용했다. 실학자의 말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수용할 만한 것은 수용했다.(김백철, ‘탕평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일제 강점기 실학을 강조한 이들은 망국의 설움 속에서 비판적 자성의 목소리를 내며 조금이나마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자 실학을 내세운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좋은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식민사관의 경계에 함몰되며 일제 침략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을 수도 있다. 조선 정부와 재야 지식인을 무능과 유능으로 대립시키는 설정, 그리고 실학자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조선 정부 비판은 일제 총독부 입맛에 그리 거슬렸을 것 같지 않다. 효용과 실용의 지나친 강조도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이나 제국주의 논리와 결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실학연구는 일제 때도 비교적 용인되었던 것은 아닐까. 앞으로 더 풀어봐야 할 의문점들이다. 실학의 실사구시가 필요하다.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⑨ 식민사관 극복하려
우키요에 화가 도시히데(年英)가 그린 1894년 '조선 경성전쟁(朝鮮 京城戰爭)'. 『우키요에 속의 조선과 중국』(2010)에 실려 있다. 우리 역사책은 주로 문명과 개화, 혹은 실학의 시대로 기억하고 있다. [사진 일조각]
19세기 말~20세기 초 대한제국 시기에도 ‘실학’이란 말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어쩌다 한두 번 사용된 정도가 아니라 일간 신문과 잡지에 자주 쓰였다. 이때 실학이란 용어는 서양문물을 수용하는 이념적 근거로 활용됐다. 서양의 문물과 신식 학문을 실학으로 규정했다. 자연과학을 가리키는 격치학, 농업·상업·공업·광업을 중심으로 하는 실업학, 법률·경제·정치학 등이 모두 실학의 범주에 들어갔다. ‘실학시대’라는 표현이 쓰일 정도였다. “금일이 가위 실학시대요 실력세계라. 실학이 무(無)하면 국가가 망하고 실력이 무하면 민족이 망한다.”(『태극학보』 1908.9.)
일본은 ‘서양 실학’이 들어오는 창구였다. 당시 ‘황성신문’을 보면, 재일 한국유학생이 여름방학 기간에 귀국하여 하기강습회를 열고 야구단을 설립하고 있음을 보도하면서 이들이 문명의 새 기운을 흡수하고 각종 실학을 수입한다고 평했다.(1909.7.23.) 일본으로 건너간 국비유학생의 현황을 소개하는 기사의 제목은 ‘유학생 실학’(1909.6.18.)이었다. 일본에 유학 가서 배우는 학문을 실학이라고 부른 것이다. ‘유학하다’를 ‘실학하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노관범, ‘전환기 실학 개념의 역사적 이해’)
황성신문 ‘일본 유신 삼십년사’ 연재
1906년 황성신문에는 ‘일본 유신 삼십년사’라는 제목의 기획이 연재됐다. 명치유신의 사상가로 알려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와 관련해 실학을 언급하면서, 후쿠자와가 설립한 경응의숙(慶應義塾·게이오대학 전신)이 명치 초년 이래 ‘서양 실학’을 양성하는 연원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 명치 초기 일본에는 서양 문물과 서양 풍속이 크게 유행하는 가운데 한자나 가나까지 폐지하려 하였고 실학뿐만 아니라 문학과 미술까지 온통 서양을 추종하는 풍조가 일어났음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특집이 기획된 1906년은 어떤 해인가. 1904년 2월 대한제국을 침략한(갑진왜란) 일제가 러일전쟁까지 승리한 후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밀어붙였다. 사실상 대한제국의 멸망이었다. 을사늑약 3일 후인 11월 20일자 ‘황성신문’ 2면에는 발행인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논설이 실렸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목 놓아 규탄한 지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바로 그 ‘황성신문’ 지면에 일제의 명치유신을 화려하게 소개하는 특집을 게재한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장지연은 을사오적을 ‘매국의 적’이라고 비난하면서, 고종황제가 승인을 거부한 을사늑약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 논설이 인쇄돼 배포되던 날 장지연은 체포됐고, 신문사에는 무기 정간령이 내려졌다. 장지연은 65일간 투옥돼 있다 1906년 1월 24일 석방되었고, 황성신문은 2월 12일부터 속간됐다. 그렇게 황성신문이 속간된 후 나온 기획이 ‘일본 유신 삼십년사’였던 것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의 황성신문, 그리고 ‘일본 유신 삼십년사’를 연재한 황성신문 사이에는 큰 간극이 놓여 있다. 을사늑약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달라지는 논조는 대한제국 운명이 이미 기울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97년 대한제국 창건 이후 고종황제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해온 근대화 개혁은 아예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일제의 명치유신과 후쿠자와가 제창한 개화의 깃발만이 휘날리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실학은 다시 한국학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해서 실학이 실제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논리로 실학을 도입했다고 흔히 말하곤 하는데, 오히려 실학은 일제의 식민사관을 대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처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시일야방성대곡’과 ‘일본 유신 삼십년사’ 사이의 넘기 힘든 간극을 이어주는 고리가 실학이었다. 후쿠자와는 1870년대 일본의 문명개화를 설계한 인물이다. 문명개화라는 말 자체가 영어 ‘civilization’을 후쿠자와가 번역한 용어다. 후쿠자와는 영어 ‘science’를 실학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문명개화를 줄여 개화로 부르는데, 문명과 개화는 후쿠자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후쿠자와의 개화는 실학이란 말로 다시 포장되었고 그것은 전면적 서양화를 의미했다. 그러나 일제를 창구로 하여 우리에게 들어온 서양 실학은 일본화를 의미할 수밖에 없었다. 실용성만 강조되는 가운데 주체가 배제된 실학이었다. 민족이 빠진 실학에 민족의 실핏줄을 이으려는 시도가 조선후기 실학자 발굴로 나타났다. 실학이 단순히 일본 닮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내부에 이미 그런 근대지향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며, 그런 움직임의 일환으로 ‘유형원-이익-정약용’이란 실학자 계보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20세기 초반의 실학 개념을 18세기 조선으로 소급 적용해 실학자의 계보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장지연에서 시작해 최남선과 정인보 등으로 이어졌다.
후쿠자와는 1884년 갑신정변 무렵부터 조선의 친일 개화파들(김옥균·박영효·유길준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갑신정변의 배후 조종자가 후쿠자와이기도 했다. 후쿠자와의 문명·개화·실학이란 포장 뒤에는 조선 침략도 포함되어 있음을 친일 개화파들은 간과했다. 후쿠자와는 적어도 1881년 무렵부터 무력을 동원한 조선 침략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그가 내세운 명분은 일본의 안보 위협이었다. 조선을 침략하는 것이 조선을 보호한다는 말로 표현되었으며, 그런 조선 보호(침략)가 일본의 안보를 위한 길이라고 강변했던 것이다. 후쿠자와의 인기는 오늘날 일본에서도 이어진다. 가장 높은 가격의 1만 엔 지폐 속 초상화가 바로 그 얼굴이다. 100여 년 전 실학이란 포장 속에 그의 침략이념이 담겼다면, 오늘날엔 매일 만나는 일본의 지폐 속에 과거의 악몽이 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동학회, 실학 앞세워 조선시대 폄하
우리가 백번을 양보해 후쿠자와가 일본의 안보 위협을 걱정한 점을 일본의 입장에서 이해해준다면, 조선과 대한제국의 안보 위협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입맛대로 역사가 서술되었으니까 별도로 치더라도, 해방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한국 근대사 서술은 어떤가. 여전히 문명개화를 19세기 후반의 핵심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조선후기 실학파에서 개화파로 이어지는 흐름이 지금까지 한국 근대사 서술의 중심 줄기다. 문명개화로 명명된 근대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광무개혁 성과가 보여주듯이 대한제국이 근대화를 거부한 것도 아니었다. 후쿠자와 식으로 말하면 일본보다 우리가 더 안보를 걱정해야 할 시기가 그때였다는 얘기다. 청나라를 물리친 일본이 조선을 송두리째 삼키려는 야욕을 노골화한 1894년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조선의 독립과 개화는 둘 다 모두 달성해야 할 궁극적 목표이겠지만, 우선순위로 따지자면 민족국가의 독립을 확보하는 것이 더 앞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는 고종의 밀지를 중심으로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전쟁이 본격화한 시기이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 때까지 전국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전쟁의 양상은 당시 고종의 비밀자금으로 창간된 ‘대한매일신보’가 유일하게 보도하여 지금까지 그 실상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 시기에 ‘황성신문’은 의병들로 하여금 일체 무기를 버리고 각기 산업에 종사하며 실력을 양성하라는 논설을 쓰기도 했다.(1907.9.25.)
신·구 학문연구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유림계의 친일화를 목표로 1907년 12월 조직된 ‘대동학회(大東學會)’의 중요한 키워드가 실학이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908년 3월에 이미 기관지 ‘대동학회월보’에는 조선시대를 폄하하는 글이 실리기 시작했다. 예송과 당쟁으로 가득한 조선시대에 실학을 강론하고 경제에 힘쓰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식이다. 이때 이미 일본은 식민사학자들을 동원해 조선의 역사를 폄하하도록 조작했는데, 곧 조선은 예송과 당쟁으로 정체된 사회였다는 것이 식민사관의 핵심이었다. 문명과 야만을 축으로 하는 후쿠자와의 실학에 이미 조선 폄하는 예고되어 있었다. 전통적 유교에서 효를 중시한 것과 달리 대동학회는 또 충효를 강조했는데, 이는 일제가 ‘교육칙어’에서 충효를 내세운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망국의 시대 충효의 대상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일제 통감부의 한국 지배에 대해 인의로 비판하지 말고 충효로 복종하라는 뜻 아닌가.(노관범, 『기억의 역전』)
경술국치를 석 달 앞둔 1910년 5월에 나온 ‘대한흥학보’의 특집은 또 다른 측면에서 주목된다. 이때도 후쿠자와의 실학을 소개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민적 교육’이 시급하다고 했다. 후쿠자와가 일으킨 실학 교육만이 능사가 아니라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공민 교육도 중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실학과 실용과 실업이라는 미명 뒤에는 일본의 한국 지배정책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파했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었던 것이다.
[실학별곡 - 신화의 종언]
⑩ 에필로그
19세기말~20세기초 서구 콤플렉스에 주눅 들었던 때와 지금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한류가 세계를 활보하고 각 분야에서 세계로 비상하는 21세기 우리 젊은 신세대에게 20세기 열등의식의 부산물인 '실학 담론'은 더 이상 유효해 보이지 않는다.
‘실학(實學)’은 본래 보통명사였다. ‘실(實)’과 ‘허(虛)’를 대비시키는 오래된 전통 화법중의 하나다. ‘실-허’ 화법은 요즘도 일상에 가끔 쓰인다. 그럴 때마다 실학이란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런 경험을 많은 이들이 할 것이다. 보통명사였던 실학이 20세기 들어 고유명사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실학이라고 하면 대개 조선후기에 경제와 실용을 중시한 학문이 떠오른다. 자연스럽게 ‘유형원-이익-정약용’ 같은 소위 실학자로 불리는 이들이 연상된다. 실학을 고유명사로 만들어낸 20세기 교육의 효과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사용될 수 있었던 ‘허-실’ 화법이 조선후기의 특정 학파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한정되어 버린 것이다.
‘실학별곡’은 이별 이야기다. 그동안 익숙했던 실학 개념과의 헤어짐이다. 고유명사를 다시 보통명사로 되돌려주는 일이기도 하다. 왜 헤어져야 하는가. 터무니없는 과장과 은폐 때문이다. 과장은 오해에서 비롯됐다. 실학의 모토 가운데 하나는 실사구시다. 실학 개념 그 자체를 실사구시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무엇이 과장인가. 소위 18세기 실학자들에 대한 평가가 너무 과장돼 있다. 실학은 흔히 주자학의 틀을 벗어나 서구식 근대화를 지향했던 학문으로 알려져 있다. 실상은 그와 많이 다르다. 18세기 실학자라고 규정된 이들의 주장을 면밀히 따져보면 ‘근대 지향’의 철학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신분제도, 토지제도, 상업·시장·화폐 등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근대적이기는커녕 오히려 복고적이었다.(김영식, 『정약용의 문제들』)
근대 지향의 실학이라면 적어도 신분제를 해소하거나 폐지하는 방향이어야 할 텐데, 소위 실학자들의 발언에서 인간의 차별 없는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선구적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천하에 나면서부터 귀한 자는 없다”(天下無生而貴者·『예기』)고 했던 공자 유학의 본령에도 못 미쳤다. 18세기 실학자들이 주자학의 틀을 벗어나 공자 본래의 사상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주장도 실제 사실과 다른 것이다. 또 중국에서는 이미 송나라 때부터 신분 차별이 크게 완화되기 시작했고, 청나라의 강희·옹정·건륭제를 거치며 1750년대 들어서는 이미 법적으로 노비소유가 금지되기까지 했는데, 이런 변화의 흐름조차도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은 반영하지 않았다.(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근대화의 진정한 사상 동력 찾는 작업
실상이 이러함에도 한국 근대화의 시동을 건 사상이 소위 18세기의 실학으로 알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근대 지향의 온갖 긍정적 요소를 실학이 독점하면서 나타난 폐해가 적지 않다. 우리 근대사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제대로 볼 수 없게 한다. 실학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보면 실학 이전은 거의 야만 상태가 되고, 실학 이후도 그 사상을 받아들여 개화하지 않으면 여전히 미개한 상태로 간주된다. 오로지 실학만이 별처럼 빛나게 되는 것이다. 서구역사가 규정해놓은 근대성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우리 민족의 지상목표가 근대화였고 지금 우리가 그 성과를 누리고 있는데, 선조들이 추진해온 근대화의 진정한 사상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살펴보자는 것이다.
18세기 실학자로 알려진 이들이 의식적으로 ‘근대적 실학’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학파를 형성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근대성을 부여하며 실학파로 만들어낸 것은 후대인 20세기 초반의 일이다. 18세기의 실학은 20세기에 역으로 재구성된 것이었다. 여기에 바로 실학의 은폐가 있고, 그것은 바로 우리 근대사의 왜곡된 실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엇이 은폐인가. 그 비밀의 코드를 풀기 위해선 우리 기억의 회로를 역순으로 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18세기부터 20세기로 내려오는 순서로 실학의 의미를 파악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애초에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0세기부터 18세기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실학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20세기 초반에 실학이란 말이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비밀의 열쇠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대개의 실학 연구가 주로 얼마나 근대 지향적인가를 입증하거나 보여주는 식이었다면, 그런 본말이 전도된 방식은 이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20세기에 ‘실학 담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분석하는 작업이야말로 21세기 한국학이 풀어야 할 과제다. 실학 담론은 18세기의 역사가 아니라 20세기의 역사라는 얘기다.(노관범, 『기억의 역전』)
19세기 말~20세기 초 대한제국 시기의 일간 신문과 잡지에 실학이란 말이 많이 쓰였는데 그것은 서양의 문물과 신식 학문을 가리켰다. 이때 실학은 문명·개화의 동의어였다. ‘서양 실학’이 들어오는 창구는 일본이었다. 일본만 실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전통 속에도 그런 ‘서양 실학=근대화’를 지향하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조선후기 실학이었다. 그것은 우월의식이 아니라 열등의식이었다. 실학으로 개화도 하고 민족사의 자부심도 세워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학 개념 그 자체의 함정까지 모두 헤아려보지는 못했다. 일제는 실학만 전파한 것이 아니었다. 그 포장을 뜯으면 침략 야욕이 숨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 발톱을 간과했다.
실학과 침략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일제의 침략 노선은 패전으로 파국을 맞았다. 그러나 실학은 그렇지 않았다. 해방 이후 오히려 더 활성화되었다. 근대화는 여전히 시대적 과제였기 때문이다.
해방 후도 한국과 일본서 ‘실학의 신화’ 계속
20세기 최대의 문제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인 육당 최남선에게서 그 흐름의 연장선이 발견된다. 20세기 초 실학 담론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 최남선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새 역사를 만드는 단계에서 가장 깊고 중요한 근본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현재 우리 국민이 세계 열국의 사이에서 가지고 있는 후진성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 그것은 우리의 고질이 되어 있는 부문주의(浮文主義·형식만 그럴듯하고 실속이 없음)를 탈각하고 오로지 실학·실증·실험의 방식으로 생활기준을 전향함에 있다. 이것은 곧 이른바 근대 정신이요, 민족 번영의 기본 원리요, 역사 창조의 원동력인 것이다.”
1955년 7월호 잡지 ‘새벽’에 실린 최남선의 글인데, 제목이 ‘실학 경시에서 온 한민족의 후진성’이다. 1908년 3년 넘게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온 최남선은 잡지 ‘소년’을 창간했다. 일본의 근대 계몽사상가로 알려진 후키자와 유키치의 글을 자신이 번역해 ‘소년’에 싣기도 했다. 실학이 근대 정신이고 민족 번영의 원리라고 하는 그의 변함없어 보이는 소신이 눈길을 끈다.
실학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1960년대 이후엔 ‘자본주의 맹아론’(내재적 발전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실학이 더욱 중시되었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마르크시즘에 기반해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이론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실학 개념 그 자체의 함정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식민지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시기에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 정부의 국정 지표인 ‘조국 근대화’를 뒷받침한 논리도 실학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978년 완간한 『한국사 』의 제14권은 이 같은 작업을 일단락 짓는 것으로, ‘근대적 사상의 맹아’라는 제목 아래 조선후기 실학을 설명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비슷하다. 명치유신의 ‘침략적 실학’을 이론화한 후쿠자와 유키치와 그의 사상이 마루야마 마사오 전 동경대 교수에 의해 부활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9년 5월 26일 동경에서 마루야마를 만난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서양은 어찌되었든 통체적 연속성을 가진 위대한 문명입니다. 동양은 아직도 서양문명의 성취를 철저히 흡수 할 필요가 있어요.”(김용옥 해제, 『일본정치사상사연구』)
마루야마는 또 “우리가 서구라파 계몽주의가 제시한 인간관의 요체를 제대로 흡수하려면 아직도 장구한 세월이 걸릴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마루야마의 이 발언은 이미 30년 전 일이다. 지금은 최남선이나 마루야마처럼 ‘서양 콤플렉스’에 주눅 들어 살던 시대가 아니다. 한류가 세계 무대를 휩쓸고 BTS가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는 현실은 예사로 보아 넘길 사건이 아니다. 이와 함께 동서 문명교류에 관한 새로운 연구 흐름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마루야마가 탄복해 마지않던 서구 계몽주의의 원류가 알고 보니 극동의 공맹사상과 관료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영미 학계의 연구가 속속 이어지고 있다. 서양이 동양을 비하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아편전쟁 이후의 일이다.
19~20세기 서양 콤플렉스의 부산물인 실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반성, 그리고 폭력적 근대화에 대한 성찰을 거친 21세기에 더 이상 실학을 고유명사로 남겨 놓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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