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딸 사고로 잃고 ㅎ병원 앞 시위 어머니 박정남 씨
-“단기 취업 딸에 경남 의령까지 무리한 검진…화 불러”
딸의 사망소식을 듣던 그날, 엄마의 영혼은 빠져나가 버렸다. 영혼이 빠져나가버린 몸뚱아리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날 그렇게 정신을 잃고 쓰러진 박정남 씨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떻게 키운 딸인데…. 얼마나 예쁜 내 딸인데…. 하루 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누구하나 딸의 죽음에 책임지지 않았다. 설명이 되지 않았다. 딸의 죽음이. 우울증 약을 먹으며 하루에도 열두번씩 죽음을 생각했다.
여기 딸을 잃은 한 어머니가 내 말을 들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억울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두달 째 북구 신안동 소재 ㅎ요양병원 앞 노상에 돗자리를 펴고, 비가 오면 비를 맞고, 햇볕 쨍쨍한 날이면 피부 껍질이 벗겨지도록 시위를 벌이고 있는 박정남 씨 이야기다.
막 의대 졸업,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고사
지난 2012년 2월7일 오전 7시10분께, 경남 의령군 의령읍 정암교를 지나던 승합차가 빙판길에 미끄러지면서 도로 난간을 뚫고 15m 아래 바닥으로 떨어졌다. 추락한 차량은 그날 새벽 광주 북구 신안동 소재 ㅎ요양병원을 출발, 경남 의령으로 출장검진을 가던 길이었다. 차량 안에 타고 있던 ㅎ병원 소속 의료진 등 10명 중 4명이 이 사고로 사망했다. 수익을 내기 위한 병원들의 무리한 출장검진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박정남 씨의 딸 고 김효진(당시 나이 27) 씨도 이날 목숨을 잃었다. 김 씨는 이제 막 의과대학을 졸업한 새내기 의사였다. ㅎ병원 정식 직원도 아니었다. 3월1일로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레지던트로 일할 예정이었던 김 씨는 가난한 가계 살림에 한 푼이라도 보탤 마음으로 ㅎ병원에 한 달 동안 단기 취업한 상태였다. 고대병원 출근 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사고가 났다.
“내 딸 효진이가 8살 때 아빠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그 때부터 내가 아이 셋을 키워야 했습니다. 조그만 시골 동네서 살기 위해 아둥바둥, 낮에는 돈벌로 발버둥치고, 밤엔 집안일 하느라 발버둥 치고 그렇게 힘들게 키웠어요. 내가 고생한 걸 효진이가 알아요. 8살 때부터 어른 같았어요. 엄마 고생 안시키겠다고 악착같이 공부를 했어요. 2004학번으로 수능을 봤는데 전남 이과 수석을 했어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장학금을 받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를 했어요. 하루 두시간 씩 잤다고 해요. 너무 잠이 와서 공부를 하다가 울었다고 해요. 하루는 200원 짜리 야쿠르트가 너무 먹고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못 사먹었다고 그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엄마가 돈 벌테니까 먹고 싶은 거 사먹어라. 공부도 잘 먹으면서 해야지’ 그랬어요. 효진이가 날마다 전화해서 자랑을 했어요. 인턴 생활할 때 교수님들이 잘한다 칭찬을 많이 했다고. 그렇게 똑똑하고 잘난 딸이였는데. 고생만 하고 죽었어. 인턴 생활 힘들잖아요.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빵 한조각으로 때우고 잠 못자고 그렇게 고생만 했어요. 의사 면허를 따고 이제 엄마 고생 안 시킬 거라고 그렇게 좋아했는데…. 결혼해서도 엄마 모실거라고 늘 그랬어요. 자기도 가난하게 컸으니 의사 되면 가난하고 어려운 환자들 돈 안받고 치료해준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졸업하고 고대병원 들어가기 전 한 달 쉬는 동안, 그냥 쉬어도 되는데 그 짧은 기간에도 돈 벌어서 동생 학비에 보태고 엄마 안 힘들게 하겠다고 단기취업을 한 거예요. 그렇게 착한 내 딸인데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었어.”
효진 씨는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을까? 박 씨는 그렇다고 본다.
“취업 당시 광주·전남만 출장 약속”
“취업 당시 광주·전남 지역만 출장검진을 한다고 해서 계약을 했다고 해요. 그런데 병원이 이윤 추구를 위해 그 먼 경남 의령까지 검진을 보낸 거예요. 광주에서 경남 의령까지 출퇴근을 하면서 무리한 운행을 했다고 해요. 차량도 낡은 봉고차량으로 검진 시간에 쫓기다보니 늘 과속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사고가 난 겁니다. 효진이가 일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하면 나한테 전화를 해서 하루 일과를 말해요. 운전기사가 제한속도를 지키지 않고 검진시간에 맞추려고 매일 같이 과속을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효진이가 `팀장님, 저 이제 출근 안할래요. 내 몸이 비싼 몸인데’ 하고 농담반 진담반 말했답니다. 그러니까 기사분이 `닥터선생님, 안전하게 모실게요’하면서 같이 근무하자고 말했다고 그래요.”
효진 씨가 세상을 떠나고 박 씨는 폐인처럼 지냈다. 살 이유가 없었고, 살고 싶지 않았다. 컴컴한 아파트 방에서 하루 종일 지냈다. 우울증 약을 먹었다. 자꾸 고생만 하다 가버린 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하루에도 열두번 씩 죽음을 생각했다. 아파트 베란다를 내다보면서 “떨어지면 죽을 수 있겠네. 어정쩡하게 살아남진 않을 높이네” 되뇌었다. 그러다가도 남은 두 자식들을 생각했다. 아빠도 죽고, 동생도 죽었는데, 엄마까지 죽으면 남은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 그래서 죽을 수 없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다. 주위 말들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억울했다. 죽은 딸만 억울했다.
“병원으로부터 `어머니 죄송하다는 말’도 듣지 못했어요. 전화 한 통 없었어요. 위로금은 커녕 장례비도 주지 않았어요. 병원이 돈 벌려고 내 딸을 그렇게 멀리까지 보냈는데 죽은 뒤엔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 내 딸이 너무 불쌍해요. 빛도 못 보고 어둠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잖아요. 사과 한 마디 없이 법대로 하자는 병원 측의 태도를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와요.”
순천에서 살고 있는 박 씨는 지난 5월13일 병원을 찾았다. 병원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만, 행정원장만 박 씨를 만났다. 사과는 받지 못했다.
5월부터 지금까지 병원 앞서 시위
5월14일부터 지금까지 박 씨는 병원 앞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100억을 줄 테니 내 딸을 살려내라”는 플래카드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잠시 잡는다. 박 씨는 밥을 못 먹어 갈비뼈가 드러나고, 엉덩이는 짓물렀다. 햇볕에 팔의 살갗이 벗겨졌다. 박 씨의 모습을 안쓰럽게 여긴 주위 사람들이 물이며, 밥을 차려 오기도 했다.
“난 이 일을 마무리지을 거예요. 이렇게라도 하면 딸의 마음이 풀릴까해서. 그 뒤에 죽더라도 죽어야지.”
그러다가도 또 딸이 생각나면 울음을 터뜨린다.
“내가 살아서 무슨 괴로움을 견디고 있나. 죽으면 다 끝나는데. 이런 생각이 하루에도 열 두번씩 들어요. 그러다가도 남아있는 첫째 딸 결혼식 시켜야 되는데 걱정이 들어요. 내 걱정은 그거 하나 뿐이에요. 첫째 딸 결혼시키는 거.”
분노가 힘이 됐다가 다시 상실의 고통이 마음을 갉아먹는다. 2012년 2월7일 김효진 씨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버렸다. 박 씨의 삶도 달라져버렸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효진 씨가 다녔던 ㅎ요양병원은 멀리까지 출장검진을 다닌다.
박 씨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돈 있는 사람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없는 사람은 죽어가는 세상. 이건 아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