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동영상 플랫폼의 혼전
작은 것들은 속도가 생명이다. 덩치 큰 둔한 것들은 방향성이 명료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어슬렁거리기는 하지만 달려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단 목표가 정해지고, 달려야 할 순간이 되면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와 자원을 투입한다.그게 덩치 큰 둔한 것들과 덩치 작은 빠른 것의
차이다. 자연 생태계이든 시장 생태계든 이 맥락은 유사하다. 넷플릭스 등은 가벼운 몸으로 시장에 진입해서 속도전을 했다. 인터넷에 진입하기로 결정한 이후 넷플릭스는 글로벌 시장으로 빠르게 진출했다. 콘텐츠의 양이 부족하다거나 현지화 전략이 부재하다는 것 등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속도를 늦추는 순간 시장에서 자리 잡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기술에 대한 애착과 집착은 갈망을 현실로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넷플릭스는 2017년 2분기에 가입자 1억 명을 돌파했다. 로쿠(Roku)도 마찬가지였고, 버즈피드도 마찬가지였다. 작고 가볍다는 것을 무기로 그들은 한순간에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트렌드를 장악했다.
덩치 큰 둔한 것들은 눈을 뜨고도 당했다.
지금까지는 여명기에 불과
전환기였기 때문이다. 덩치 큰 둔한 것들도 시장이 전환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는지는 몰랐을 뿐이다. 알고 있는 것은 과거의 문법이었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법은 그들로서도
난생처음인 탓이다. 무거운 발을 들어 몇 가지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 시행착오의 횟수만 많아질 뿐이다. 가야 하지만 집중하지 못했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서 애먼 땀만 흘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지지부진하긴 했지만, 덩치 작은 빠른
것들이 헤쳐간 길을 보면서 가야 할 곳과 무엇을 해야 할지가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도 그랬다. 지난 20여 년 동안 유료화를 추진했으나 이제 겨우 안착할 수 있는 모델을 찾았다. 그사이에 인건비는 반으로 줄었고, 매출도 반으로 줄었다.줄어든 매출 구조에 맞는 비용 구조를 만들었고, 비로소 광고 수익보다 디지털 구독 수익이 더 많은 수익 모델을 찾고 만들 수 있었다.1 이제 가능성을 보았으니 뉴욕타임스는 전력을 다할 것이다.
독보적인 저널리즘이 필요하다는 그들의 선언은 이제 목표가 정해졌다는 것을 시장에 알리는 신호였다. 방송 시장에서도 덩치 큰 것들의 움직임이 본격화 하기 시작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옮겨가는 시대고, 고정형에서 모바일로 옮겨가는 시대다. 시장의 트렌드를 읽는 사람들이라면 향후 수십 년 안에 모든 서비스가 클라우드 기반의 OTT(Over The Top) 서비스로 옮겨갈 것을 예상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OTT와 기존 방송 시장과의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확연히 넘어갔다는 것은 미국의 유료방송 시장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더구나 콘텐츠의 가치가 희석되고 다른 서비스를 위한 부가서비스화하는 경향도 명확하다.
거인의 변신=‘시대정신’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듯이 OTT나 온라인으로 가야 한다는 건 사족일 뿐이다. 여러 지표가 온라인과 OTT가 대세임을 말하고 있다. 아마존의 시가총액이 이미 월마트를 넘어섰고,테슬라는 GM의 시가총액을 넘어섰다. 네이버 (26.57조 원)가 SKT(22.33조 원)의 시가총액을 넘어섰다. 조만간 핀테크 기업의 기업공개(IPO)가 진행되면 금융시장도 이 추세를 따를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문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시장이 있다.
바로 미디어 시장이다. 현재까지 가장 빠르게 성장한 미디어 기업은 넷플릭스다. 미디어 역사상
유례없는 1억 명이 넘는 유료 가입자를 확보하고,인터넷이 들어간 국가 대부분에서 이용할 수 있는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가 바로 넷플릭스다. 상거래 시장에 아마존이 있고, 자동차 시장에 테슬라가 있다면 미디어 시장에는 넷플릭스가 있는 셈이다.
이 넷플릭스의 2017년 7월 28일 현재 시가총액은 794억 달러다. 반면 컴캐스트의 시가총액이
1,874억 달러, 디즈니의 시가총액이 1,720억 달러다. 물론 ‘아직’은 이란 단서를 붙일 수도 있겠지만, 영상 시장에서 오프라인 사업자의 위세는 여전히 대단하다.
이는 단순히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만 시장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아마존이
온라인이고, 월마트가 오프라인이고, 테슬라가온라인 기반이며, GM이 오프라인 기반이지만,
이런 시장과 달리 미디어 시장에서는 온라인 기반의
넷플릭스가 오프라인 기반의 컴캐스트와 디즈니를 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온라인 대 오프라인과는 다른 논리가 필요하다.
월마트와 컴캐스트를 비교해보면 답이 나온다.월마트의 시가총액 추이는 횡보다. 그러나 컴캐스트의 시가총액은 2000년을 기점으로 상승 일변도다.
넷플릭스가 등장해서 시장을 침투해 들어가던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결과다
플랫폼 기업이던 컴캐스트는 2000년대 이후 전방위적으로 외연을 확대했다. NBCU를 인수해서
콘텐츠 포트폴리오를 확보했고, 무산되긴 했지만 타임워너 케이블을 인수해서 시장 경쟁력을
확보하려고도 한 바 있다. 최근에는 드림웍스를 인수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표적인 MCN 사업자인
어썸니스TV를 자사의 포트폴리오에 흡수했다.
더구나 컴캐스트는 스트림과 와쳐블이란 OTT 서비스를 출시하면서 자사의 서비스를 방어하기도
했다. 시장이 OTT로 가는 상황에서도 지킬 것과 움직여야 할 것들을 분별했다. 심지어 넷플릭스조차컴캐스트의 품안으로 들였다. 그리곤 2017년 하반기에는 Xfinity Instant TV로 실시간이 포함된OTT 서비스를 출시할 생각이다. 케이블이란 지위를 버릴 준비도 하고 있다.
2014년부터 자사의 엑스피니티(Xfinity) 서비스를 클 라 우 드 기 반 서 비 스 로 이 전 하 고 있 다 .2016년 연말에는 차터커뮤니케이션스(Charter Communications) 등 다른 케이블 사업자들도 자사의 독립적인 셋톱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고 엑스피니티 서비스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쇼(Shaw)커뮤니케이션스에서도 엑스피니티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다른 유료방송 사업자들이 SKB의 STB UI/UX를 이용해서 자사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클라우드 서비스로 넘어갔으니, 언제든지 OTT로 전환할 수 있다.
다만 아직은 엑스피니티 보급률이 50% 내외라는 점은 시간을 좀 더 벌어야 한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즉,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핵심이 아니다. 그보다는 혁신을 동반한 변신 여부가 핵심이다. 아마존은 설립 이후 지속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바꿔왔지만, 월마트는 그러지 못했다 .
테슬라가 시대의 총아가 된 이후에도 지속적 혁신을 통해 변신을 거듭해왔다면 GM은 그러지 못했다. 스스로 정한 사업의 범위에 갇혀 있는 사업자와 그렇지 않은사업자의 구별일 뿐이다. 컴캐스트는 변신해왔다. 아날로그 사업자에서 디지털 사업자로 변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 시장의 당면 과제이고 시대정신이다
거인이 움직인다
거인이 몸을 움직이면 시장의 속도는 빨라진다.훌루와 AT&T의 디렉TV는 상징적이다. 훌루는
2015년부터 진용을 정리해 본격적으로 OTT 서비스 경쟁을 펼치기 시작했다. 2014년은 미국 미디어 시장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미국 역사상 실시간 라이브 방송을 시작한 첫해다. 1994년 넷스케이프가 등장하면서 WWW의 시대를 연 이래로 동영상 사업자들이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유료 방송 시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장을 열기까지20년이 걸린 셈이다. 유료 방송 시장을 겨냥한 칼날을 요리조리 피하던 사업자들이 이제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내 사업자들이 1998년을 전후해서 홈페이지에서 실시간 방송 서비스를 제공하고 온라인에서 VOD 서비스를 제공한 것과는 사뭇 다른 조치다. 그러던 훌루가 타임워너 등 케이블 진영 내 콘텐츠 사업자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이른바 지 상 파 네트워크만의 연합전선에서 범(汎)콘텐츠 진영의 서비스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16년부터는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오리지널 콘텐츠는 해당 플랫폼의 독점 콘텐츠를 의미한다. 즉, 훌루에서만
볼 수 있는 콘텐츠를 생산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플랫폼과 본격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유료 방송 사업자와의 일전도 불사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장의 징후는 훌루의 방향성과 동일하다. 2008년 당시 NBCU의 CEO이던 제프 주커(JeffZucker)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콘텐츠를 디지털 시장에 유통시키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때 등장한 용어가 바로 “Trading Analog Dollars for Digital Pennies”란 표현이다. 아날로그 시장에서 제값 받고 거래되는 콘텐츠를 디지털 시장에서 푼돈 취급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그만큼 미디어 사업자들은 디지털이란 거대한 물결에 저항했다.
그러나 2013년 CNN 인터내셔널 본부장을 맡은 제프의 발언은 조금 달라진다. 완강히 거부하던
그가 디지털을 껴안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미디어 시장이 그렇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뒤에 그가 취한 선택은 크게 세 가지다. 기존 콘텐츠의 유통 경로를 전통적인 TV는 물론이고 PC나 모바일에서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고, 그레이트빅스토리(Great Big Story)란 별도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모바일에 적합한 콘텐츠를 생산, 유통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16년에는 유튜브 내 유명 채널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변화는 북미 미디어 사업자들에게는 일종의 각인처럼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유료 방송 사업자도 결단을 한다. AT&T는 무려 480억 달러를 지불하고 위성방송인 디렉TV를
인수했다. IPTV를 이미 가지고 있는 상태였기에 디렉TV를 인수하면서 미국 시장 내 제1의 유료
방송 사업자로 등극했다. 시장을 방어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런데 AT&T의
선언은 도발적이다. 2016년 AT&T는 디렉TV나우를 출시하면서 2020년까지 OTT 서비스를 자사
서비스의 핵심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실시간 채널이 포함된 OTT 서비스를 의미한다. 이는
자사의 IPTV나 디렉TV의 완벽한 대체재다. 그동안 미국의 OTT 서비스는 VOD 서비스만 있었기
때문에 실시간이 강조된 유료 방송과는 상당 부분 보완재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는 실시간 + 스트리밍 서비스의 OTT와, 실시간 + VOD 서비스의 유료 방송 간 경쟁이 되는 셈이다. 본격적인 대체 서비스 간 경쟁이 펼쳐졌다. 사실상 미국 시장 내 유료 방송 사업자가 자신의 목줄을 쥘 수 있는 경쟁 서비스를 스스로 출시한 셈이다.
70달러에 달하는 금액에도 불구하고 2017년 2분기 현재 40만 명 정도의 가입자를 모았다. 소니의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플레이스테이션 뷰(Vue)도 45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했다. 슬링(Sling)의 가입자는 170만 명에 달한다. 시장이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
훌루의 경우는 콘텐츠 진영이 OTT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하는 조치라고 한다면,
디렉TV나우는 플랫폼 진영이 OTT를 수용하기 시 작 한 첫 움 직 임 이 다 . 거인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2014년 발걸음을 뗀 후 채 3년도 되지 않아 전체 생태계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탈(脫)영역 간 경쟁의 시작
여기까지는 제공하는 아이템이 유사했다는 점에서 확장의 범위와 방향성이 선명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놓인 그림은 미디어 기업과 비(非)미디어 기업이 소비자의 주목을 놓고 새로운 경쟁을
펼치는 구도로의 전환이다. 자칫하면 미디어 기업이 비미디어 기업의 CP(Content Provider)로
전환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 북미 시장에서는 더더욱 이런 우려가 강하다.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콘텐츠가 타사 서비스를 통해서
소비자를 만나는 상황이 벌어진 탓이다. 바로 페이스북이다.
구글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그래도
고객들을 자사 서비스로 유치할 여지가 있었지만, 페이스북은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소비하게 한다. 자사 서비스로 더는 이동하지 않는다. 텍스트만 그런 줄 알았지만, 이제는 텍스트가 아니라
동영상까지 이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질문을 전문가들이 던지고 있긴 하지만, 이런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2017년 3분기에 페이스북에서만 유통되는 드라마가 등장할 조짐이고 보면 더 이상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고 있다. 미디어만 제공하는 사업자와 미디어와 함께 여타 부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자 간 미묘한 갈등이 빚어질 여지가 있는 셈이다.
사업모델(Business Model)도 충돌한다. 2017년 2분기 실적 보고서를 보면 구글과 페이스북의
가져가는 형 국 이 다 . 동영상으로 좁 혀 보면 여전히 TV 광고 시장이 압도적이긴 하지만, 광고
매체로서의 가치로만 접근하면 이제 TV 시장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밀레니얼이
있는 모바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이 시장에서도 균열이 발생할 조짐이다. 상징적인 기사가 실렸다. 구글과 페이스북이 아마존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뜬금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아마존이 대세라는 표현은 적합하지만, 구글과 페이스북과는 사업 모델이 다른데, 긴장해야 하다니. 가구업체와 요식업소가 서로 긴장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대목에서 반전이 시작된다. 아마존이 구글과 페이스북이 점령하고 있는 온라인 광고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존의 2017년 2분기 실적 자료를 보면 ‘기타 판매’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온라인 광고 실적이라는 이야기다. 성장률로만 따지면 아마존웹서비스(AWS)보다 높고, 실제 판매량도 많다. 기타 부문은 전년 대비 51% 증가했다.
금액으로는 9억4,500만 달러다(성장률로만 따지면 소매점 서비스 혹은 프라임 서비스 성장률만 51% 증가한 21억 달러를 기록했다). 물론 광고시장의 점유율로 치면 겨우 1% 내외인지라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1%로 시작해서 시장을 잡아먹은 예가 어디 한두 가지인가.
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읽힌다. 탈(脫)경계가 더욱 심화된다는 의미다. 유료 방송과 OTT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온라인 상거래와 오프라인 상거래의 경계가 사라졌다. 이제는 사업자의 BM도 충돌하기 시작했다. 커머스 사업자인 아마존이 광고를 무기로 페이스북이나 구글과 경쟁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마존의 프라임은 미디어 사업자와 격돌을 강화하는 그림이었는데, 영역이 더는 의미 없게 되었다. 미디어 사업자가 커머스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7년 미디어 시장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작은 아이들만의 놀이터에 외눈 거인이 들어왔다. 놀이터는 커졌다.
커진 놀이터를 보고 세 눈 거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