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IA

임진왜란- 명군의 참전과 역할

이피디 2016. 7. 18. 22:17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유에 관해서는 명백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런고로 여러가지 잡스런 야사들이 많지만 이 전쟁의 목적이나 전략적인 시각에서 보나 참전할 필요성은 명백했다.

우선 상술한 내용을 보면 알다시피, 당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궁극적인 목적은 명나라를 정복하여 중국 대륙에 진출하는 것이었지 조선을 정복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본래 조선에 통보한 요구사항도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할 것과 명나라를 치는데 앞잡이가 될 것' 이었고, 이런 불손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다가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대마도주가 온건하게 돌려 말한답시고 바꾼 것도 '명을 치러 가는데 조선은 명으로 침공할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이었으므로 어느 쪽이든 일본이 명나라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는 분명했다.

또한 당시 명나라는 북쪽에는 북원과 적대적이라 토목의 변이 일어난 적도 있고, 남쪽 국경에는 베트남과도 전쟁을 치뤄 점령했다가 물러난 적도 있다. 게다가 이때까지는 큰 위협은 아니었지만 여진족도 있다. 이런 판국에 일본은 명나라를 정벌하겠다고 대놓고 적대적인대다가 2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데, 조선을 집어삼키면 국력이 더 커지고 명나라와 국경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면 명나라의 동북 국경에 못해도 수십만 병력을 상시 주둔시켜야 하고 이 막대한 비용을 두고두고 감당해야 한다. 게다가 일본이 북원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침공한다면 아무리 명나라라도 간단히 막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반면에, 조선은 건국이후 명나라에 침략은 커녕 절대적인 우호국이었으니, 당연히 조선을 살려두는게 명나라에 이득이 된다. 온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쌓이는건 명나라로서도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명나라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수백년간 수십만 대군을 주둔시킬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으니 단기적으로는 임진왜란에 참전하는게 명나라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참전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은 만력제가 동의한 것도 사실이나 더 중요한건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인 석성의 적극적인 참전 주장때문이었다. 석성은 홍순언과의 야사가 유명하지만 종계변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야사는 야사. 실제로는 저런 야사때문에 조선을 도운게 아니라 병부상서를 맡았던 인물인 만큼 당시 명나라의 국제정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 사이 조선의 연이은 요청으로 도 심각성을 느끼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참전했다. 참전 초기에는 빠르게 일본군을 밀어내며 금세 일본군을 몰아낼 줄 알았으나 오히려 일본군이 종전 협상을 요청할 때마다 그걸 들어주느라 시간을 끌어서 전쟁이 7년이나 지속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조선군이야 어떤 방법을 쓰던 당장 일본을 몰아내고 싶었겠지만, 명군은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였기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싸우지 않고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교를 담당한게 심유경인 게 문제.[43]

제1차 조승훈의 5천명은 평양성 공격에 실패(7월), 제2차 이여송이 이끄는 4만명이 12월 압록강을 건너 다음해 정월 최신 대포로 포격해 평양성을 탈환(1593.1.27)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무리하게 남하하다가 고양 벽제관(碧蹄館)에서 매복에 걸려 패배하였고, 개성으로 퇴각한 뒤 전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교착상태를 벌인다. 그 뒤 일본군은 행주 대첩에서 패배, 북쪽으로는 명군 남쪽으로는 조선군으로 쌈싸먹힐 위기에 처하였고, 명나라와 교섭을 진행하여 결국 한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1593.5.18)



하지만 명군의 참전은 분명히 의의가 있었고, 특별한 케이스인 벽제관 전투 같은 몇몇 패배한 전투가 있기는 하지만 평양성 전투, 직산 전투처럼 승리한 전투도 있고 명군이 못 싸운 것이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명군이 형편없는 군대였다면 전쟁 중 조선에서 명군의 편제와 교리, 무기를 다급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이여송이 평양을 우수한 화력과 기술력, 전략으로 점령했을 때, 일본군은 정말 심각한 패닉에 빠졌고 조선군의 사기는 고조되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상대가 명군이라서 도망치는 경우도 많았다

결론적으로 명군은 그럭저럭 제 역할을 해냈으며, 7년동안 각지에서 명군과 조선군이 연합해서 많은 전투에서 활약했다. 명군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더불어 명군이 대규모의 육군을 파병하게 되면서 조선은 그때까지 유지하던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며 숫자를 줄이게 된다. 병농일치제인 조선에게 있어 생산 가능 인구를 군대에 잡아두는건 국가 생산력에도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는 부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17만에 육박했던 조선군은 명군의 참전이후 크게 줄어든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 당시의 명군은 후반의 조선 조정의 주요 딜탱 역할을 수행한 셈이고, 조선의 수군, 근왕병, 의병이 서폿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유재란 즈음에는 숫적으로 명군이 주력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은 최대 17만, 명군은 약 5만이었지만 정유재란 당시에 조선군은 약 3만, 명군은 최대 11만에 달했다.

이 외에도 명군이 아니라 명나라가 조선에 큰 도움을 준 바가 또 있다. 가령, 임진년 이후부터 명나라는 산동 등지에서 군량을 조달하여 현지의 명나라 병사들과 조선인들에게 뿌렸는데, 이 덕에 전쟁과 기근에 따른 조선의 식량사정이 나아졌다. 사실 명나라 역시 자국 군대가 조선에 끼친 바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배려하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때 지원한 식량은 후일 조선에서 환대미라 하여 다시 상환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명의 지원은 2차대전 당시 미군랜드리스에 버금간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당시 선조가 재조지은이라고까지 한 것이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준할 레벨이다. 한국의 TV 드라마나 미디어에서는 민족주의+근대 이후로 중국을 멸시하게 된 풍조+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등으로 명군의 활약을 묻어가는 경향이 강한데, 백성에 대한 횡포와는 별개로 명군은 분명 왜군을 격퇴하는데 어마어마한 도움을 줬다. 그리고 백성에게 패악질을 한게 잘한건 결코 아니지만, '끝까지 저항한 지역은 민간인까지 학살하는게 기본 옵션인 왜군'과 '구성원 개개인의 도덕적 해이와 일탈로 패악질을 하는 명군'을 같은 레벨로 볼 수는 없다. 게다가 명군 개개인 단위의 횡포와는 별개로, 명나라 조정은 정확히 말하면 만력제 공식적으로 조선에 식량까지 지원해줬다. 또한 징비록에서는 백성들이 굶어죽어가자 자기네 군량 50석을 내어줬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참전한 만큼의 몫을 톡톡히 해준 명군이지만 후대에 이르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민폐만 끼친 양 묘사되기도 한다. 이는 명군의 입장상 적극적인 전투 참여가 적었고[51] 벽제관 전투에서 패전하여 전선을 고착화시킨 것도 있지만, 명군의 심각한 약탈과 엉망진창인 군기의 역할이 컸다.[52]

게다가 징비록 등 여러 신뢰할 만한 사료에서는 명군의 장수들이 조선의 관료를 폭행하거나 무례하게 군 일이 많아서[53] 애를 먹게 했다고 기록돼 있는데[54], 이렇게 명군이 장수와 병사 할 것 없이 조선의 조정, 백성들에게 일관되게 나쁜 모습을 보여준 탓에, 명은 멸망의 원인이 됐을 정도로 성심껏 자국의 역량을 다 들어바쳐서 조선을 도와주고도 비난받는 꼴이 됐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중국인들은 임진왜란 관련 창작물에서 명군이 나쁘게 나오는 걸 보고 도와주러 온 자국 군대를 욕하는 한국인들이 뻔뻔하다며 비난할 정도다. 당시의 명군은 기강이 엉망이었고, 여러 지방에서 온 장수들이 군벌처럼 병사를 거느린 탓에 상호 협조나 전략적 교류가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실제로 몇 년 안가 모문룡 같은 막장스러운 장수[55]가 나타난 것도 명군의 말기적 상태를 보여주는 좋은 예.

약탈과 보급상 무리수가 발생한 이유를 살펴보자면, 명나라 군대의 규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명나라 군대도 사람이니까, 식량은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명나라 군대가 식량을 조달할 방법은 2가지가 있는데, 조선에서 돈을 주고 사먹는 방법과 중국에서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방법이다.

첫번째 방법이 불가능한 이유는, 명군의 식량 보급이 명의 은본위제를 이용해 식량을 구매해서 사용하는 방식에 상당부분 의존했는데 조선은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아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명은 중기 이후로 식량을 직접 운반하는 방식을 포기하고 민간 상인을 이용해 식량을 운반하도록 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즉, 명의 중앙정부가 직접 군량을 군대가 있는 곳까지 수송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상인들이 군량 수송을 맡겨서 병졸들에게 은을 지급하여 이것으로 알아서 식량을 사먹도록 한 것이다. 이는 명이 은본위 경제체제를 구축한 것과 맞물려서 상당히 효율적으로 돌아갔고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얻었다.[56] 그러나 이러한 명의 병참체계는 조선에서는 활용할 수가 없었다. 조선은 아직 현물경제체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57]

결국 두번째 방법인 직접 수송을 시도했는데, 이것은 실로 엄청난 노동력을 요구하는 힘든 작업이었다. 명은 자국 상인들을 끌어들여 보급을 해결하려 했지만 조선까지는 너무 멀었기 때문에 협조를 많이 얻지 못했다.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위험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협조하는 상인들이 적었던 것이다. 협조하는 상인들도 이제까지 하던 대로 요동까지만 식량을 수송해 놓아서, 결국 요동에서부터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는 조선에게도 존재했다. 조선의 수송체계는 수운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수운체계 하에서 명군의 주요 기지인 평안도는 예외였기 때문에(공교롭게도 '명의 사신을 맞이할 때를 위해서' 라는 이유였다) 수운이 제대로 형성된 지역이 아니었고[58], 따라서 기껏 요동까지 식량을 실어와도 이걸 수운을 통해 전선까지 운반할 능력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황해도 일대에서 배를 끌어왔지만 이것도 수량이 부족했다. 결국 육상으로 병참을 대야 했는데, 그 결과 수십만의 조선군 및 백성들이 식량을 나르다 지쳐서 죽는 상황이 전개되어 버린 것이다.[59] 임진년 17만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했던 조선이 이후 동원력이 점점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은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식량을 공출했지만 그 식량을 제대로 실어 나르기가 너무나 힘들었고, 후방 거점에 쌓여서 제대로 수송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명군 참전 이후 의병들이 줄어든 것은 이런 사정도 있는데, 상당수의 의병들도 이 수송작업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현지보급을 통해 병참을 수행하는 것이 현실적이지만, 이미 임진년 전란을 거치며 관야에 비축한 식량은 남아난 게 없었다는 게 또 문제. 약탈없이 현지보급이 이루어지려면 사회지도층 내지는 관야에서 식량을 제공해야 하지만 이미 그런게 남아난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다 상국의 구원병이라는 오만함까지 있었기 때문에 약탈에 가까운 현지조달이 일상화되었다.

명은 조선에게도 식량을 사들일 것과 은광을 개발해 은을 채굴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조선 입장에서 이를 해결하는 것은 무리였다.[60] 여기에 이런 군량 수송을 맡은 명 상인들이 식량을 착복하는 행위가 자행되어 보급문제를 심화하기도 했다.[61]

여기에 명군의 군기마저 매우 나빠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당시 명군은 내몽골만주와의 국경을 지키는 몽골인여진족 그리고 다우르족(거란잔존세력) 혼성부대인 북병과 조총홍이포로 무장한 남병이 있었다. 북병은 주로 기병이었고 거의 주축은 몽골기병이었으며 남병은 보병포병이었다. 여기서 북병은 대부분이 말도 안 통하던 오랑캐 출신들로 기강이 엉망이었으며 되려 평양을 몽골 기병대가 약탈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조선은 명군에 대해 그나마 군기가 살아있던 남병은 약탈이 덜한데 북병은 약탈이 너무 심하다면서 남병 중심으로 지원군이 왔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유성룡도 이 부분을 징비록에서 수시로 불평하고 있다. 조총홍이포 그리고 불화살 등의 화약으로 무장한 명나라 남방군은 승률도 높고 조선군과 같이 싸우는 데 적극적이었던 데 반해 정작 이여송이 직접 통솔하는 북군은 전투를 회피했다는 것이다.[62]

이런저런 이유로 명군은 약탈을 자행했고, 이것이 명군에 대한 이미지를 극히 나쁘게 하여 후세에는 한것도 없이 짐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약탈의 정도만 따지면 일본군이 심하면 심했지 당연히 덜하진 않았다.[63]

물론 이에 대해서 명군을 그럼 배제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긴 했지만, 그럼 전쟁은 조선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의병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일정 수준 이상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웠고[64], 정규군도 개편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수성전에 치중했다. 그렇다 보니 조선으로서는 명군을 어떻게든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사실상 의병들보다 정규군이 주전력이자 활약을 많이 하였는데 정규군마저 사기와 훈련도가 그렇게 높지 않아서 조선이 자력으로 일본군을 이길 수 있을지는 의문인 상황이었다. 단적인 사례로 고대일록(孤臺日錄) 1592년 6월 15일을 보면

○ 6월 15일 계묘(癸卯) 충청도 순찰사(忠淸道巡察使) 윤선각(尹先覺)ㆍ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광(李洸)ㆍ경상도 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수(金睟)의 군대가 수원(水原)에서 궤멸되었다. 군대가 패배하던 날은 6월 초순이었지만 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전갈이 비로소 도달했다. 이에 앞서 이광은 스스로 근왕(勤王)을 칭하며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윤선각은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김수는 50여 명을 거느리고 수원에 진을 쳤다. 일본 기병 여섯이 깃발을 세우고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오자, 1만여 명의 조선 군인들은 겁먹고 무너져 갑옷과 활을 내팽겨치면서 달아났다. 버려진 양식과 궁시(弓矢)ㆍ깃발ㆍ북 등의 물건이 산처럼 쌓였다. 그 외에 상실(喪失)한 것은 파악조차 할 수가 없었다.

보다시피 제대로 된 전투 병력이라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병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명군의 참전으로 일본군이 조선 정복에 회의적으로 변한 것도 있고[65] 솔직히 일본군에 계속 밀리고 있던 판국에서 대국인 명이 계속 지원해준다는 사실로 인해 조선군의 사기 역시 올라갔을 것이다. 까놓고 조선 스스로는 대패하고 있던 상황에서 자력으로만 일본군과 싸워야 할 상황이 되었다면 조선 병사들과 장군들이 제대로 된 사기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물론 분전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6.25 때 미군이 없었다고 생각을 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참고로 고대일록은 공문서나 사문서를 참고해 비교적 객관적·사실적으로 역사를 전하고 있으며, 특히 1592년부터 1593년까지의 임진왜란 초기 사회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들어 있고 임진왜란 당시 사대부들이 겪은 애환과 향촌사회 연구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 또한 다수 포함하고 있어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자력으로 조선군이 많이 이기고 있었다는 주장도 일본의 자료[67]와 비교를 해보면 정말 그렇게까지 이기고 있었을까?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