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IA

[금일소사]8월29일-천자의 나라가 반식민지로, 난징조약(1842)

이피디 2015. 8. 29. 16:00

 

 

5년 전 런던 여행 당시 최고재판소 인근에서 만났던 동상 하나.

 

자유당 당수로 4차례나 수상을 역임하며 영국 양당제 정착에 크게 기여한

글래드스턴이다.

백작작위를 끝끝내 거부하고 위대한 평민으로 남은 인물이며

처칠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역대급 수상으로 꼽힌다.

 

 

 

 

 

수상 재임시에 아일랜드 식민지에 대한 자치권 부여를 주장했고

여성,노동자들의 권익신장에도 이바지했다.

 

대영제국이 유지되기 위해선 유연한 식민지 정책이 필수라고 생각했으며

평의원 시절엔 아편전쟁을 필사적으로 반대한 인물이기도 하다.

 

전쟁에 반대하며 그가 남긴 연설을 들어보자.

 

 

"중국 청나라에게는 아편을 금지시킬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영국의 외무장관은 청나라의 정당한 권리마저 짓밟으며

이 부정한 무역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정하고 치욕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지금은 저 추악한 아편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와 그 이득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로인해 영국의 국왕과 대영제국이 입을 명예, 위신, 존엄성의 손실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국기는 더럽혀졌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깃발을 끌어내리고

우리의 배를 불태울 때, 우리는 분노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대영제국의 국기가 펄럭이는 것을 보아도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도 없으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격을 느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윈스턴 처칠, 만델라 등과 함께 Parliament square에 그 동상이 우뚝 서 있는

파머스톤 당시 수상은 "아편은 술보다 해독이 덜하다"는 궤변을 펼치며

파병동의를 구했고 그때까지도 살아있던 웰링턴 공작은

"50년의 공직생활 중 유니언 잭이 광동에서 당한 것 같은

모욕을 본 적이 없다" 며 개전론을 펼쳤다.

 

파병안이 겨우 9표차이로 의회를 통과했을 정도로 영국 내에서도 부도덕한 전쟁이라는 비난 여론 속에 전개된 것이 바로 아편전쟁이다.

 

 

1792년 매카트니 사절단이 당시 최신식 소총 등의 선물을 건륭제에 바치기도 했으나 웬일인지 청나라는 이러한 신무기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홍이포와 화승총 수준에 정체되어 있는 청군이 이미 증기선을 실전투입하고 있는 영국군의 상대가 될 리는 없었다.

 

영국은 1839113일 원정군을 파견했고 본격적인 교전은 1840년에 시작된다. 보통 1840년을 아편전쟁 발발의 해로 간주하며 이는 중국 근세와 최근세를 나누는 기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1842년 오늘, 전후처리를 위한 이른바 난징조약이 체결된다.

청나라 흠차대신 기영(耆英), 이리포(伊里布)와 영국 전권대사 포틴저 사이에 체결된 것으로 홍콩의 할양(훗날 1860~1997년까지의 조차로 변경), 5개 항구의 개항, 영사재판권, 치외법권 등을 인정하는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이자 지대물박의 중화제국이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G2로 불리며 제법 국력이 충실해진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소위 잃어버린 150을 보상받기 위해 일단 군사적인 부분에서 굴기를 실현하기 위해 벼르고 있다.

 

대통령의 참석여부 때문에 논란을 빚었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 역시 그 일환이다.

물론 현존하는 미국과의 격차는 물론 중국을 가상적으로 설정한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가 1차적인 숙제가 될 것이다.

 

경제적으로 대중국 의존도가 지나치게 커진 한국은 중국의 눈치를 안 실필 수

없게 돼 버렸지만, 미국의 극동 최대 우방인 일본은 전혀 경우가 다르다.

기본적으로 중국의 잃어버린 150년 동안 가장 철저히 중국을 유린해본

장본인이기에 내심 중국을 두려워하기보다 경제는 물론

군사적으로도 해 볼만한 상대로 여기며 중국의 팽창을 오히려 

자국의 훌륭한 재무장 구실로 삼고 있다. 

현재까지는 재래식 전력만으로 중국해군이 일본 해자대를 제압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물론 거대한 영토와 세계최대의 인구를 가진 이 나라의 잠재력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부 서구학자들은 중국이 최강국에 등극하는 게 아니고

탈환하는 것이라고 서술한다.

영국의 계량경제학자 앵거스 매디슨의 추정에 따르면 1820년대 중국의 GDP

전 세계 총생산의 32%에 달하는 슈퍼 강대국이었다.

인구도 전 세계 4분의 143700만 명 수준이었다.

하지만 1870년대 중국의 GDP가 차지하는 비율은 17.1%로 반토막 났고, 19138.8%,  1950년에는 4.5%까지 추락했다.

 

대륙은 다시금 세계를 호령할 수 있을까. 그들의 잃어버린 150년이 시작됐던 기점 난징 조약이 1842년 오늘 체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