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터전이 혐오시설에 의해 잠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 15년 넘게 싸우고 있는 마을이 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법’과 ‘행정’앞에서 번번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들이 논과 밭 심지어 주택가에 들어선 공장 때문에 각종 공해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막을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 다섯 개의 마을이 모두 ‘준공업지역’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사면초가에 놓인 마을사람들은 급기야 마을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이들의 마지막 요구는 “쾌적한 곳으로의 이주”다.
광주시는 1991년 광산구 장록동 일대를 평동산업단지로 조성하면서 7년 뒤인 1998년 평동산단 주변을 ‘준공업지역’으로 지정했다. ‘준공업지역’은 공업지역의 업무 기능을 보완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시계획조례에 따른 활용이 가능한 지역을 말한다. 광주시 도시계획조례(올 6월30일 개정)에 따르면 ‘준공업지역’은 주택, 시장, 공장, 도축장 등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준공업지역’에 폐기물 처리장 등 혐오시설 대거 진입의 근거가 되는 대목이다.
▶주택·시장·공장·도축장까지 가능
문제는 다섯 개 마을 장록, 송촌, 지로, 영천, 용동 일부가 평동 ‘준공업지역’에 포함된 것이다. 이곳은 마을 원주민들이 마을을 형성해 농사짓고 살았던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광주시의 도시계획 여파로 우후죽순 들어서는 공장들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관할구청과 광주시에 민원을 제기하고, 주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시위도 벌였지만 ‘준공업지역’ 안에서는 모두 헛수고였던 것이다.
광주시와 관할구청이 ‘준공업지역’ 규정이라는 명목으로 민원을 묵살해 온 사이 평동 준공업지역에는 업체 185개가 들어섰고, 지금도 공장 설립이 진행 중에 있다. 수십 개의 쓰레기 처리장에서 내뿜는 악취와 공장의 소음 등 각종 공해에 노출돼 온 주민들은 이제 분노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동네가 아주 난리에요. 집 바로 옆에서 공장이 돌아가고, 비닐하우스 바로 뒤에 공장이 햇빛을 가리고 서 있고요. (동네에) 폐기물 처리장은 몇 곳이나 되는지 세기도 어렵네요. 소음과 악취 때문에 구청하고 시에 민원을 제기하고 싸우기도 엄청 싸웠지만 다 소용없어요. (행정기관들이) ‘준공업지역’이라는 ‘법’을 들이대면서 주민들의 생존권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겁니다.”
용동마을 통장인 이준경 씨는 마을에 혐오시설이 계속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싸움에 늘 함께 했다. 그동안 광주시와 구청과의 싸움의 기록들을 모은 파일을 들추던 그가 한 탄원서를 보여주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폐축전지 처리업체로 고통 배가
“2009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던 적이 있었어요. 마을에서 200m 떨어진 곳에 폐축전지 처리업체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거에요. 2년 동안 이 업체에서 나온 매연과 악취로 주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던 거죠. 행정기관에 탄원서를 냈지만 `단속 하겠다’는 답변만 돌아왔고, 그 업체는 아직까지 그 자리에서 뻔뻔하게 운영되고 있어요.”
폐축전지 처리업체는 환경부 허가를 받아야 하는 `지정폐기물 처리업체’로 산업단지에 입주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업체가 입주할 당시(2006년)에는 별도의 규제가 없었던 탓에 법상으로는 적법한 절차를 거친 셈이 됐다. (본보 2009년 3월19일자 `머리가 아파요’ 보도)
“주민들이 피해 보상을 바랐던 게 아니에요. 폐축전지와 기름을 섞어 태워 중금속 등이 발생하면 폐암에 걸릴 확률이 올라가잖아요? 그러니 폐축전지 처리업체에 대한 허가를 취소하거나 이전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탄원서였던 거예요.”
광주시의 “지속적인 지도 점검” 약속은 부질없는 일이 됐다. “폐축전지 처리업체를 비롯해 대부분의 폐기물 처리업체들은 공무원 단속시간을 피해 소각을 하고 있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현재 평동 준공업지역에선 조망권 침해 피해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가지농사를 짓고 있는 김기호 영천마을 통장은 하우스 바로 옆에 들어선 공장 때문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2년 전 들어선 공장이 햇빛을 막아 난방비는 곱절로 들고, 가지 수확량은 절반으로 준 것. 주민들에 따르면 농작물 피해 뿐 아니라 주택가의 조망권 침해도 심각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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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망권 침해에 농사·생활 모두 엉망
평동 준공업지역 주민들의 피해가 날이 갈수록 심해짐에도 불구하고 광주시가 뾰족한 대안 마련을 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올 2월 다섯 개 마을 통장을 중심으로 `주민이주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주민이주대책위’ 수석대표를 맡은 이준경 용동마을 통장은 “동네마다 공장이 가득 들어차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며 “단속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주민들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주거지 이전밖에 없다”고 밝혔다.
“`준공업지역’이라는 말이 좋죠. 평동 준공업지역은 공업지역이 다 됐어요. 이 많은 공장들을 모두 평동산단에 흡수시키려면 그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테니 훨씬 적은 비용으로 주민들을 이주시켜 달라는 게 주민들의 마지막 요구입니다. 이제 주민들도 연세가 많이 드셔서 싸울 힘이 없어요, 정말로.”
현재 `주민이주대책위’는 주민들과 협의를 거쳐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김동철 국회의원 면담을 비롯해 광산구청장과 주민간담회를 진행하는 등 `마지막 요구’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김우리 기자 uri@gjdream.com